파키스탄 무슬림 선교

파키스탄에서의 선교 경험을 나눈다.

파키스탄 선교

들어가는 말

2001년 파키스탄 땅을 처음 밟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좀 늦게 들어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많은 서구 선교사들이 일찍이 들어와 무슬림 사역과 현지 교회사역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9/11테러 사건이후 대부분 철수한 상황이었지만 이미 그들이 시작한 신학교, 병원, 학교, 호스텔 등의 사역들은 선교사들이 계속되는 재정지원으로 현지인들에 의해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사명을 가지고 남겨진 사역들을 감당하기에 그들은 준비되어 있는 모습으로 보이지 않았다. 많은 문제들이 선교사들이 떠난 사역 현장에서 드러나게 되었고 선교에 있어 가장 중요한 중심사역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우리 모두에게 여러 숙제를 남겨주었다. 기초부터 새롭게 세워가는 일은 쉽지 않았지만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유일한 우리의 소명이자 주님의 명령인 제자사역에 집중하면서 주님이 인도하시는 데로 한 걸음씩 사역의 길을 열어갔다. 언제든 우리가 선교지를 떠나게 될 때 건물과 조직이 아닌 십자가 죄사함의 복음으로 무장된 증인들이 남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1. 파키스탄 북부 히말리야 산골에서 사역을 시작

중국 서북부 티벳에서 7년간 사역을 했다. 티벳 장족과 중국 한족들 사이에서 자신들의 무슬림 정체성을 강하게 유지하며 살아가는 회민을 전도하기 시작했고 성령의 역사로 주께로 돌아온 한 가정이 중심이 되어 회민 교회를 개척하게 되었다. 성경공부를 하며 제자양육을 통해 믿음을 세워갔고 예수님에 대해 바른 신앙고백으로 인도해 갔다.

또한 주님은 중국 서북부 신장자치주 등으로 인도해 주셨는데 그곳으로 전도여행을 하며 복음은 계속해서 서쪽을 향해 높은 산들과 사막을 지나 예루살렘까지 가야 한다는 깨달음을 주셨다. 1998년부터 “캐쉬미르”지역의 지도를 보여주셨고 이곳이 주님이 나에게 주실 새로운 선교지라 믿으며 기도로 준비해 갔다.

그 다음 해 중국 공안이 우리를 미행하는 것을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고 결국 미행에 실패한 공안은 경찰서로 오라는 출석통보를 받았다. 특수공안실에서 3시간 정도 심문을 받고 그 다음날로 우리 가족 모두는 황망히 짐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채 추방이 되어야 했다. 주님의 계획대로 그 다음 해에 바로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파키스탄령 “캐쉬미르”라는 히말리야 북부 산악지대에 자리하고 있는 행정도시로 어린 두 아이를 데리고 새로운 선교지에 삶을 시작했다.  

이곳은 파키스탄의 수도 이슬라마바드에서 북쪽으로18시간을 인더스 강을 따라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지만 또한 가장 험하고 위험한 “카라코람 하이웨이(Karakoram Highway:KKH)”를 달려야 도착하는 깊은 히말라야 산골 마을이었다. 이 도로는 파키스탄 북부를 통해 중국을 갈 수 있는 유일한 도로다. 이 유명한 도로는 중국 정부에서 파키스탄과 교역을 위해 중국인 노동자들을 동원하여 10년 넘게 만든 도로인데 험하고 높은 산을 깎아서 만들어야 하는 고난도 작업으로 인해 수 백명의 노동자가 사망하여 북부 지역에 그들을 위한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이 험한 도로를 타고 오고 가면서 이곳 현지 정부로부터 추방될 때까지 10년의 모험적 사역을 할 수 있었고, 수많은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었다.

  • 파키스탄 무슬림 그들은 누구인가?  

이곳 히말리야 북부 캐쉬미얼 행정도시 길깃에서의 삶은 파키스탄 이슬람과 무슬림을 깊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샘플링된 도시였다. 이 작은 도시 안에는 시아와 수니파 사람들로 나뉘어서 서로 모살, 암살을 하는 지역이었고, 때때로 두 종파 간에 긴장이 고조될 때는 계엄령을 내리기도 했다. 가끔 총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어야 했고 긴장된 상황을 피해 가며 조심스럽게 사역을 해야만 했었다. 그 때는 수니 사람들이 타고 다니는 공공버스나 병원이 따로 있을 정도였고, 정부 각 부서가 수니파 혹은 시아파 사람들로 구성되어 서로 나누어 분할 통치를 하고 있었다. 한번은 회사 운전사에게 물어보았다. ‘너희들은 어떻게 수니인지 시아인지 구분하느냐?’ 했는데 운전사가 대답하기를 ‘우리는 10미터 전방에서 냄새로 알아본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이들은 우리 외지인들은 상상도 못하는 그런 “종파주의(Sectarianism)”가 모든 삶의 영역에 스며 있었고 그것에 묶여서 살아가는 모습을 경험하면서 파키스탄의 내부 사정을 더욱 잘 알게 되었다. 대도시에 살았다면 이런 종파주의적 삶의 사정을 잘 몰랐을 것 같다.

예를 들어 시아 사람들이 있는 정부 기관에 가서 비즈니스 대화를 하게 될 때 수니 사람과 동행하게 되면 될 일도 거절당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곳에서 우리는 “여행사”를 운영하면서 시아 지역은 시아 가이드를, 수니 지역은 수니 가이드를 이용해야 했었다. 그것은 수니 운전사가 차를 가지고 시아 동네에 들어가는 것 자체를 무척이나 어려워했다. 실제로 우리 수니 파트너는 시아파 사람들에게 밤에 차를 타고 귀가하다가 총격을 당하여 여러 발 맞았지만 다행이도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곳은 수니 시아파 동네가 분명히 나누어져 따로 따로 살고 있었다. 그 중간은 없다.

  1. 이슬람 공화국 파키스탄의 시작

1947년 파키스탄은 이슬람이 다수인 지역을 중심으로 힌두교인 인도로부터 종교적 자유와 독립을 위해 세워졌다. 그 과정에서 두 종교간의 갈등은 수많은 사람들이 보복 학살의 희생이 되어 갔고 지금도 두 나라는 원수와 같이 지내고 있다.

파키스탄은 인구 거의 대부분 약 95,5%가 무슬림이다. 그만큼 소수종교(힌두교, 기독교,시크교 등)에 대한 탄압도 심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가 거주했던 북쪽 히말리야 캐쉬미르는 지금도 인도와 파키스탄이 계속 충돌하여 유엔의 평화유지군이 주둔하고 있는 분쟁지역으로 남아있다.

2)종파주의로 나누어진 파키스탄

먼저 파키스탄 이슬람 종파는 크게 수니, 시아, 이스마일리 등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들은 섞여 살지 않는다. 물론 통혼도 금지되어 있다. 농촌이나 시골에 들어갈수록 그 모습은 더욱더 분명하게 보인다. 도시에서도 잘 살펴보면 경계가 모호한 것 같지만 모든 부분에서 자기들만의 종파 섹터(Block)들을 만들어 놓고 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실제로 1988년 북쪽 칠라스에 사는 수니파 사람들이 수십 킬로 떨어져 사는 시아파 마을들을 습격해서 그 마을 전체 사람들과 가축까지도 도륙한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외지인들을 향해 늘 경계와 의심을 가지고 대하게 되었다.

수니파:

  파키스탄 수니파에는 여러 분파가 있는데 소위 탈레반이라고 하는 근본주의자들이 있는가 하면 비교적 교육 수준이 높은 개방된 수니 사람들도 있다. 파키스탄 북부는 대부분 탈레반 분파로서 한 때 비즈니스 파트너였던 친구도 아프칸에 가서 지하드 운전병으로 훈련을 받은 사람이었다. 파키스탄 안에 수니 인구는 전 인구에 약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데 강경 보수적 성향을 가지고 있다. 이에 반해 시아파는 25% 정도인데 교육수준이 상대적으로 높아 파키스탄 정부 조직의 거의 모든 부서를 장악하고 있다. 군부, 보안, 행정, 외교, 통신, 전기, 수도, 세무, 등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어 소수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결코 작지 않다. 파키스탄 군부는 독립된 기관으로 정치에 절대적인 실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래서 외교적으로 파키스탄은 시아 수니파 나라 모두에게 친분을 가지고 유익을 챙기고 있지만 외교는 시아 종주국인 친이란 성향을 가지고 있다. 이로 인해 파키스탄 경제는 두 종파 알력 다툼 속에서 개발과 발전을 위해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경제적 후진국 상태를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파키스탄 내부자 고발을 들어보면 파키스탄은 이란과 사우디 중간에서 줄타기 외교를 하고 있지만 이란의 전략적 정책으로 인해 파키스탄 개발은 허락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파키스탄이 개발되면 이란은 수니 대국인 사우디와 파키스탄 사이에 끼워진 나라가 되기 때문에 이란에 절대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이들은 설명하고 있다. 실질적으로 파키스탄 영토 안에는 석유와 가스가 풍부히 매장되어 있다. 이것들만 개발해도 이란을 곧 추월하고 사우디와 같은 부국이 될 수 있는데 지금 정략적으로 이러한 개발을 막고 있다.

수니파 사람들은 마치 대나무와 같이 강경하지만 가끔씩 이들이 회심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 중에는 종교 지도자들도 포함되어 있다.

시아파:

이들 그룹은 수니파 사람들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데 그것은 자기들의 이맘 후세인 알리가 수니파 사람들로부터 참수를 당한 것을 기억하고 매년 아슈라(Ashura)를 통해 원한의 칼을 갈고 있다. 전 세계 수니 인구에 비해 시아파 인구는 약 17%로서 소수 종파이지만 수니파 못지 않게 시아의 종주국인 이란을 중심으로 세력확장에 힘을 쏟고 있다. 소위 시아벨트 구축을 위한 노선이 중국 서북부 신장에서 파키스탄 캐쉬미르 파키스탄 이란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까지가 이들이 구상하는 시아 안보 경제벨트이다.

파키스탄 중국 국경에서 이란 국경까지 시아 물품이 수니파 사람들에게 막힘없이 이란까지 잘 흘러가도록 적소에 전략적으로 시아 마을 형성과 모스크를 앞에 내세워 벨트 구축을 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들에게 있어 도로는 그 핵심역할을 하고 있다고 판단되기 때문에 중요 도로나 지역에는 시아 깃발이 세워져 있다.

파키스탄 사람들에게 만약 이란과 파키스탄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면 누구를 위해 싸울 것인가? 물어보면 시아 사람들은 100% 자기 나라 파키스탄을 위해 싸우겠다는 사람이 없고 이란을 위해 싸울 것이다 라고 말한다. 어찌 보면 이들 종파에 묶여 있는 사람들은 나라 개념보다 “종파”개념 더 강하고 나라가 자기들의 목숨을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종파세력이 자기들의 안전을 지켜준다고 믿고 있었다.

파키스탄 시아 사람들은 수니파 사람들과 같이 종교교육에 목숨을 걸지 않는다. 시아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소위 세속교육에 엄청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많은 시아 사람들은 영어 수학 과학 화학 등을 배워 석사 박사 학위를 얻어서 정부 고위직 자리에 취업을 하게 되어 사회적 신분상승을 얻게 된다. 언제부터 수니파 사람들도 세속교육의 가치와 유익을 알고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아직도 상당수 수니 사람들은 세속교육을 멀리하고 오직 “종교교육(마드라샤) 학교”에 아이들을 보내어 오직 코란과 아랍어 그리고 종교 교육을 시키고 있다. 파키스탄 전체에 종교교육만 시키는 마드라샤 학교는 약 4~5만여 학교가 존재한다. 수도 이슬라마바드에만 약 53개 종교학교가 운영되고 있다고 정부기관에서는 밝히고 있지만 실제적으로 상당히 많은 학교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시아 사람들은 수니 보다 좀 더 개방적이고 세속적 가치와 유익에 대해 민감하게 대처한다. 그래서 파키스탄 안에 소수민족으로 살아가는 기독교를 비롯한 타 종교 사람들과 연대하는 의미에서 좋은 이웃이 되어 주는 경우도 많다.

이스마일파:

  수니 시아 종파로부터 이단으로 취급을 받는 종파다. 그것은 바로 “이스마일리파”이다. 이들 종파는 살아있는 “아가 칸”이라는 교주(이맘=영적 리더로서 스위스에 거주, 전 세계 25개국에서 천 5백만명 신도 보유)를 믿고 있는 시아파의 분파이다. 특히 북부 장수 마을로 알려진 훈자지역을 중심으로 파키스탄 전역에 가장 큰 NGO(비정부기관)를 운영하고 있고, 은행과 호텔 그리고 병원 학교를 운영하면서 엄청 큰 재정 프로젝트를 가지고 이스마일리 공동체를 지원하면서 세력 확장을 꾀하고 있다.

이 종파의 특징은 하루 다섯 번의 기도나 라마단 금식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코란 보다 아가 칸이 만든 책(아가 칸 어록집)을 더 믿고 있고, 교주 아가 칸은 예수님과 같이 죄가 없으며(여러 번 결혼 혹은 이혼의 경력이 있음), 예배실도 ‘모스크’라고 하지 않고 ‘자마타나’라고 부르면서 마치 기독교 교회 조직과 같이 만들어 생활하고 있고, 또한 기독교에 대해 오픈된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성경을 주면 ‘고맙다’라고 하면서 잘 받기도 하는 독특한 분파이다.

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수니 시아파 중에서는 간혹 ‘회심자’들이 나오지만 이 오픈된 이스마일리 분파에서는 거의 회심자들이 나오지 않고 있다.

처음에는 이 종파의 특성을 알지 못해 소위 “오픈된 종파라는” 오해 속에서 서구 사역자들이 물량 공세를 통한 전도를 시도했지만 결과는 의외였다. 훈자 지역 대부분의 사람들은 집집마다 전도자들이 나누어진 성경을 갖고 있다. 그들이 거절하지 않고 복음을 듣고 성경도 받으며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을 때까지 열린 태도와 친절로 대해주는 것은 이들의 교주 아가 칸으로부터 지시받은 훈령을 배운 결과이다.

왜냐하면 이들의 교주 아가 칸은 유럽에 살면서 수많은 펀드를 가져오는데 대부분 기독교에 관련된 나라, 정부, 기관들로부터 받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 특히 선교사들을 어떻게 대하여야 하는지 이미 훈련받은 이들 현지 이스마일리 사람들은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친절 그 이상으로 대하는 것을 경험한다. 어떻게 보면 강경한 수니나 시아보다 이들을 전도하는데 있어 어려움이 더 많은 것은 강력한 이스마일리 경제 사회 공동체로 똘똘 뭉쳐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전도를 시도했던 이웃집 이스마일리 여성이 우리에게 들려 준 말은 “만약 우리가 기독교인이 된다면 지구를 떠나야 한다”라고 했다. 그만큼 이들 이스마일리는 수니로부터 때로는 시아파로부터 공격과 비난 그리고 경제적 소외를 당해왔기 때문에 소수 종파로 살아남기 위해 더 탄탄한 결속력 있는 공동체로 뭉쳐 살아왔고 그래서 이들이 공동체를 떠나 회심하여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는 의미가 된다.

  • 기독교에 대한 오해들

이들은 기독교에 대해 많은 오해와 상처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미국과 유럽이 기독교를 대표한다고 생각한다. 영화나 문화적 컨텐츠를 통해 이런 서구 사회를 간접 경험하면서 서구 문화와 기독교 가치를 동일시하면서 많은 오해를 갖게 되었다. 정치적인 부분에서도 우리가 기독교인이라 소개되어지면 곧바로 우리를 친미주의자로 취급하며 거리를 두고자 한다. 특히 할리우드 영화속에서 표현되어지는 폭력, 성 문란 등이 마치 기독교적 삶의 모습이라 믿고 있기에 먼저 이 오해들을 불식시키는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복음전도는 많은 장애를 겪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곧 타락한 사람이 되는 길이라 생각하고 있다.

실제로 무슬림을 상대로 사역하는 분들 대부분 이들이 얼마나 기독교에 대해 심각한 오해를 갖고 있는지 여러 상황들 속에서 경험한 것을 듣게 된다. 한 청년은 기독교로 개종하여 세례를 받고 기뻐하며 고백했던 것이 “이제 나도 기독교인이 되었으니 하나님 안에서 내가 원하는 여자들과 잠자리를 할 수 있다”며 좋아하는 것을 들으면서 순간 멘탈 붕괴를 경험한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우리가 이들에게 복음을 들고 접근할 때에 이들의 생각속에 왜곡되어진 기독교에 대한 모든 가치를 먼저 이해하고 우리의 기독교적 삶을 보여주는 것과 함께 복음 전도가 병행해야 바르게 복음이 전해지는 것을 보았다. 우리도 이웃과 가까이 지내며 이 오해를 푸는 데에 5년이라는 시간이 걸려야 했다.

또한 하나는 십자가에 대한 혐오인데 우리 아이들이 현지 학교를 다니면서 선생님들이 수업 시간에 “십자군 전쟁”을 이야기하면서 기독교와 십자가에 대한 혐오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어 유일한 크리스챤이었던 우리 아이들은 두려움까지 느껴가며 수업을 받아야 했다.

또한 삼위일체에 대한 오해로 하나님 아버지와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아들 예수로 이해하기 때문에 기독교 교리적 오해도 많다.

기독교에 대한 또 하나의 오해는 바로 “성경이 변질되었다”라는 것이다. 대부분 무슬림들이 기독교를 공격할 때에 빠지지 않고 반박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우리 성경은 여러 번역본이 많은데 이것을 가지고 문제를 삼고 있으며 후대에 기독교인들이 인간인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신격화하기 위해 성경을 변질했다고 어릴 때부터 세뇌되어 왔다. 또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달리실 때 죽기 전에 다른 사람으로 대체되었다는 주장까지 하고 있다.

  • 선교적 접근을 위한 몇 가지 제안
  • 선교는 영적전쟁이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적보다 더 강한 무기로 무장해야만 한다. 의심할 여지 없이 우리의 강력한 무기는 하나님 진리의 말씀이다. 그 어떤 열심과 용기도 진리로 무장하는 것을 대체할 수는 없다. 진리로 무장한다는 것은 아버지의 계시 안에서 십자가의 은혜로 죄사함을 얻었다는 개인적이고 분명한 영적인 경험과 깨달음이 있는 죄사함의 증인이 된다는 것이다. 단순히 하나님의 살아 계심 만을 경험하거나 기도응답을 받고 필요한 훈련을 받고 교회를 섬기고 사역에서 인정받는 것과 증인이 된다는 것은 완전 별개의 문제이다. 선교지에서 무슬림 영혼을 만났을 때 그 영혼들을 십자가와 죄사함의 은혜로 인도하는데 가장 확실하고 유일한 방법은 그들 앞에 죄사함의 증인의 모습으로 도전하는 것이다. 뜨거운 열정과 열심만 가지고 이슬람 선교를 접근하는 일은 많은 시행착오와 부정적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는 것을 선교지에서 종종 목격하게 되는 사실이다.

악한 원수는 끊임없이 하나님 나라 확장을 막고 영혼들이 어두움에서 빛 가운데 나아오는 것을 막기 위해 분주하다. 그래서 그들이 사용하는 무기 중에 하나가 우리를 기만당하게 하는 것이다.

많은 경우 선교사를 만난 무슬림들이 경제적 유익과 신분 상승을 얻고자 기대하며 허위 개종의 모습을 보일 때가 많다. 거짓된 고백과 진실하게 회심한 영혼들을 분별하는 분별력이 없다면 우리가 기대하는 사역의 결과는 결코 얻을 수 없다. 단지 겉모습만 개종한 그들을 제자라 오해하며 사역의 열매라 스스로 속는다면 진정한 교회를 세우는 것이 가능할까? 따라서 사역자는 죄사함의 증인이 먼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제자들이 보냄을 받아 주님의 교회를 세워야 한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다. 우리가 진리로 무장할 때 성령은 역사하시고 많은 영혼들은 빛 가운데 진리와 생명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다.

  • 꿈과 환상 혹은 치유의 기적을 통해 회심하는 경우

하나님의 성령께서 기도하는 영혼들과 이웃과 친구가 되어 기독교적인 삶을 나눈 영혼들에게 꿈과 환상으로 역사하실 때가 있다. 이 때가 중요한 “선교의 시작”이라고 보면 된다.

주님께서 만지신 이들 영혼들은 꿈에서 만난 예수님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찾아올 때가 있다. 그래서 먼저 신약의 복음서 말씀으로 예수님에 대한 정확한 “복음 전도”가 필요하다. 무슬림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을 한다는 것은 오직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하다. 이러한 은혜가 임할 때까지 먼저 이들에게 복음서를 가지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가르쳐야 한다. 그 이유는 이들은 예수님을 단순 인간 선지자로 믿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회개는 성령님의 역사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믿어지게 될 때 일어난다. 이때로부터 이들의 고백이 달라지고 죄사함의 은혜를 깨닫게 된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성령의 도우심으로 깨닫게 되면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게 된다. 예수님을 곧바로 하나님으로 소개하게 되면 오해도 일어나고 어려워하지만 복음서를 가지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깨닫아 지게 되면 믿음을 고백하게 되는데 그 때 이들은 예수님을 나의 주님, 하나님의 아들로 이해하고 믿게 되는 것을 본다.

진심으로 회심한 무슬림들은 삶의 변화를 경험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이 기간에 가족이 제일 먼저 눈치를 채기 때문에 기쁨과 두려움이 공존하는 시기를 갖는데 이 때 선교사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3) 회심한 영혼들을 인도하기

그러므로 이슬람 사회에서 개종된 무슬림들을 어떻게 관리를 해야 하는 것이 가장 큰 숙제이며 또한 전도된 사람이나 전도한 사람 모두 현실적인 목숨의 위협을 받기 때문에 개종된 무슬림 후속 관리가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현지에서 이런 사람들을 다른 대 도시로 이동시켜 보호를 받게 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그러면 그 후속 책임을 서로가 지고 가야 하기에 매우 어려운 상황으로 빠지게 된다.

우리는 일단 어느 정도 믿음이 자랄 때까지 비밀리에 믿음 생활하다가 여건이 되면 다른 대도시로 보낼 생각도 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가족과 직장을 버리고 개종자가 홀로 밖에서 살아가는 것이 서로에게 큰 도전이 되는 것을 발견하고 다른 대안을 찾아보았다.

무슬림을 전도함에 있어 중국을 제외한 이슬람 국가는 전도를 불법과 신성모독죄로 고발되기에 전도가 제한되어 있고, 만약 개종자가 나오면 그 지역 마을 전체에게 책임을 묻는 관행이 있기에 개종자 자신만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그 가족 전체에게 책임을 물어 가족이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여 “명예살인”을 당하는 경우도 많다.

4) 다른 목적으로 접근하는 무슬림 분별하기

선교사가 엔지오 같은 단체를 운영하면서 현지 무슬림들을 고용하는 경우와 회사 직원으로 고용하는 경우에 많은 무슬림들은 몇 가지 이유들을 가지고 회심했다고 하면서 개인적으로 접근하는 경우가 많다.

첫째, 자기가 예수님의 꿈을 꾸었다고 하면서 꿈에 예수님은 아니지만 하얀 옷을 입은 사람을 보았다라든가 혹은 이와 비슷한 꿈 이야기를 자주하여 선교사의 환심을 사고자 하는 경우가 있다.

둘째, 직장과 도움을 얻기 위해 선교사가 무엇을 원하는지 나름대로 파악하고 성경에 관심이 있다며 접근해 오는 경우가 있다.

셋째, 무슬림들은 종교에 대해서는 서로가 경계하고 있다. 특히 외지인 사람들을 만나면 종교가 무엇인지를 물어보는 경우가 많은데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 밝히면 감시하는 눈초리를 보내는 사람도 있고, 기독교에 대한 잘못된 정보를 나누는 사람도 있고, 실속 있게 관계 맺기 차원에서 무시하는 경우도 있지만 종교에 대해서 만큼은 민감하기 때문에 가족에게나 당국에 보고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정보를 얻기 위해 접근하는 무슬림들도 있다.

  • 선교적 접근을 위한 준비

1)  신뢰가 가는 신분

보통 일반적으로 파키스탄에서 무슬림들을 상대로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들의 신분은 엔지오 혹은 비즈니스를 하는 분들이다. 선교사 신분으로 무슬림 전도를 시도하는 분들은 선교사 비자법에 따라 바로 제재가 들어오기에 자연스럽게 무슬림들을 만나면서 종교 이야기를 하는 것이 어렵다.

하지만 일반 신분으로 들어온 선교사들은 무슬림들과 이웃하면서 혹은 비즈니스 친구로 연결되면서 복음과 성경을 나눌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 진다. 이 때 선교사가 자기가 하는 사업이나 엔지오의 전문성과 아이템이 없거나 혹은 비즈니스 아이템과 전문성이 없으면 의심을 사게 된다. 일반 선교사로서 무슬림을 상대로 선교를 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전문성과 신뢰받는 아이템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또한 재정에 대해서도 중요한 신뢰변수가 되는 것을 보았다. 사업은 안 되는 것 같은데 돈을 쓰는 것이 많아 보이면 의심을 하기 시작하고 이웃과 친구 간의 신뢰적 관계 구축은 어렵다.

그래서 재정과 수입이 어느 정도 밸런스를 맞추어 살아가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어야 한다.  

2) 가족이 주는 유익

선교지에서 무슬림과 무슬림 이웃을 만들려면 가족이 좋은 도구가 된다. 특히 대부분 무슬림 사회는 종교상 “가족 중심”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기에 가족이 그들 가운데 들어가 사역을 할 경우 가족은 정말 좋은 사역의 중심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무슬림 선교는 싱글 여성 선교사보다 가정을 이룬 선교사들이 필요하다고 본다. 물론 싱글 여성 선교사들도 많은 사역을 감당하지만 무슬림 사역에서는 수많은 제약을 받고 있기에 추천하지는 않는다.  

저희는 가족이 들어가서 시작했기 때문에 우리 아이들이 이웃집과 좋은 다리 역할을 해 주었기에 처음에는 담을 쌓고 지내다가 나중에는 “쪽 문”을 만들어 한 가족과 같이 지낸 적이 있었다. 그 때 무슬림의 삶을 가장 가까이에서 경험할 수 있었고, 여러 도움을 받은 적이 있다. 또한 이러한 이웃을 통해 이들의 공동체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서 이들의 삶의 문제들을 여러 측면에서 경험할 수 있었다. 우리 가족 역시 모든 삶을 이웃들 앞에 공유하며 그들이 갖고 있는 기독교에 대한 오해(기독교 가족은 무너져 있다)를 불식시키고 기독교 가정을 간접적으로 경험케 되면서 이들이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을 보았다.

또한 친구 가족들을 초대하여 한국 음식을 나눌 수 있는 기회도 있었는데 처음에는 할랄(정결음식)음식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간접적으로 거절을 많이 당했지만 나중에 우리가 먹는 음식들을 이야기해 주고 아내가 부엌으로 안내하여 음식 조미료 재료가 다 이곳 시장에서 산 할랄 음식임을 설명해 주고 나서 초대가 성립될 수 있었다.

가끔 집에서 티 타임이나 파티 초대를 통해서도 우리 삶을 오픈하는 기회가 될 수 있었는데 복음과 기독교 삶을 나누는 기회가 많았었다. 우리는 이들 이웃들로부터 이러한 질문 등을 받았는데 “너희 기독교인들은 모두 이렇게 살고 있나? 그리고 네 남편과 같이 모든 기독교인들은 부부가 서로 존중하고 돕는가? 만약 그렇다면 우리 딸들을 기독교인들에게 시집보내고 싶다”라며 그들이 경험한 첫번째 크리스챤 가정으로써 우리의 역할은 결코 작지 않은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

이슬람 선교를 위한 싱글 선교사는 추천하지 않지만 “엄마”의 역할은 무궁하다고 본다. 밖에서 공개적으로 선교를 못하는 환경이지만 아내는 집 안에서 여러 프로그램을 만들어 이웃집과 친구들의 아내들을 초대하여 자연스럽게 문화와 종교의 경계를 넘나들며 수많은 가능성을 만들어 가는 것을 보았다. 실제로 그 중에 몇 분이 복음에 대해 마음을 열고 또한 꿈도 꾸는 등 여러 역사들도 있었다. 물론 나중에 남편과 가족이 알고 우리 집 출입을 제한하는 어려움은 있었지만 집 안 깊숙이 숨어있는 무슬림 여인들과 접촉하는 유일한 방법으로서 아내의 역할은 적지 않다. 

          3)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알리는 과정

          처음에는 현지화 적응 차원에서 현지 옷(씰와즈, 까미즈=파키스탄 일반 종교의상)과 음식(인도 카레로 손으로 먹는 방법)을 잘 알아야 한다. 처음에는 현지 옷을 입고 다녔지만 무슬림으로 오해를 받아서 다시 일반 옷으로 갈아입고 다니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성 같은 경우 현지 옷을 입는 경우에 유익한 점이 많다. 첫째, 안전하다. 물론 아내가 현지 옷을 입고 시장에 나가도 현지인들이 여성이 밖에 나와 다니는 것을 못 마땅히 생각해서 그런지 가끔씩 뒤로 와서 성추행을 하곤 했었다. 둘째, 존경을 받는다. 우리를 보통 중국인으로 오해를 하고 다녔는데 이들이 중국인에 대한 하대가 심한데 그 이유는 중국인은 무엇이든지 먹고 마시고 또한 종교적인 책도 없고 알라도 없다고 하여 아에 무시하는 경향이 많다. 하지만 여성이 현지 옷을 입고 다니면 존경하고 칭찬을 하기도 한다.

음식도 보통 손으로 집어서 먹기 때문에 문화충격을 받을 만하다. 정말 쉽지 않는 음식문화이지만 몇 번 시도를 하다 보면 곧 익숙해진다.

이렇게 현지화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기독교인”으로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믿음이 충만한 모습으로 이들에게 비추기 보다는 “성실하고 진실한 사람 신뢰를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비추어 지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도 현지인들은 시간 좀 지나게 되면 곧바로 우리가 선교사라는 것을 눈치를 챈다.

그래서 현지인들이 우리가 선교사로 눈치를 체기 전 신분을 위한 사업셋팅을 해 놓아야 되는데 그것은 여러 인허가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먼저 현지 파트너와의 관계를 공고히 해 놓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현지 파트너에게 시간을 투자하여 친구관계로 설정되어야 앞으로 일어날 여러 어려움들에 대해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첫번째 현지 파트너를 잘못 만나 여러 어려움을 겪었지만 다행이도 두 번째 파트너는 비록 탈레반이었지만 서로 가족 간에 신뢰를 쌓으며 좋은 친구가 되었고 사역과 사업에서 만나는 어려움들을 앞에서 막아주는 방패 역할을 해 주었다. 결과적으로 현지 파트너가 선교의 중요한 역할을 해 준 셈이다. 때때로 파트너와 잘못된 관계를 맺으면 사업과 사역에서 위기를 맞이할 수도 있고 신분 노출로 인해 고발당하거나 비자에 어려움으로 사역지를 옮기거나 추방당하는 경우도 있다.

  • 현지 지역교회와의 협력의 중요성

지금까지 무슬림 지역이나 나라에서 열매를 찾아보기가 어려웠던 이유 중 하나는 회심한 무슬림들을 계속적으로 보호하고 돌보는 믿음의 공동체로서 지역교회의 중요성이 간과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선교사가 회심자들을 얻게 되면 반드시 믿음의 공동체에 소속되어 지체들과의 교제와 양육을 받도록 인도해야 한다. 새로운 생명이 주 안에서 탄생한 이후 건강하게 영적 성장을 경험하기 위해 믿음의 공동체인 지역교회 이상의 좋은 환경은 없다. 보통은 회심 이후에 신변의 위협으로 지나치게 선교사에게 의존하며 해외로 도피할 생각 이외에는 다른 생각을 갖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실제적으로 서구 선교사들에 의해 많은 소위 회심자들이 해외로 빠져나갔다. 파키스탄 상황을 보자면 지역 교회가   감시와 핍박과 소외속에서 힘겹게 생존해 오면서 회심한 무슬림을 형제로 받아들이는 위험을 감수하기에는 그들의 믿음은 연약했다.

한 회심자는 세례를 받기위해 지역교회 목회자를 찾아갔지만 번번히 거절당했다. 무슬렘에게 세례를 준 교회로 낙인이 찍히면 가족과 주변사람들에게 보복을 당할 수 있기에 선뜻 나서지 못하는 것이다.

많은 이슬람 나라 안에는 수많은 작은 지역교회들이 존재하고 신학교까지 운영하고 있지만 정작 무슬림들이 회개하고 돌아올 때 그들을 형제와 자매로 받아들이고 고난과 핍박을 함께 감당하고자 하는 성숙한 교회가 없다면 회심자들은 방황속에서 다시 믿음을 잃어버리게 되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이슬람 사역자들이 무슬렘을 전도하는 일뿐만 아니라 이러한 연약한 지역교회들까지 품고 협력을 위해 양육하고 제자삼는 훈련을 해야 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지역교회에 소속되지 않은 회심자들은 선교사가 떠나고 나면 믿음을 잃어버릴 위험에 처하게 된다.

나아가는 말

           무슬림들의 천국관은 “술과 여자들”이 있는 곳이며 향락을 즐기고 마시고 먹는 곳이라

           믿고 있고 그러한 천국의 회화적인 그림들이 카펫 등에 수 놓아져 있다. 물론 무슬림들

           은 비무슬림 앞에서 이러한 이야기를 회피한다.

           마호메트가 초승달이 뜬 밤에 신자들을 이끌고 메디나로 가서 정치와 종교를 하나로

           결합된 이슬람 공동체인 움마를 622년에 세우고 메카를 점령하고 곧 아라비아 반도

           전체를 통일하여 전 세계 이슬람을 전파한지 1,400년이 흘렀다. 기독교회가 이슬람을

           선교하기 시작한지 약 80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처음에는 무력과 물질로 하다가

  차후에는 사랑과 기도 그리고 눈물과 순교로 선교를 감당해 왔다.

           하지만 이슬람 세계 선교를 해 오면서 선교의 주체인 교회는 죄사함의 복음과 능력을

           잃어버리고 교회의 촛대는 유럽에서 미국으로 미국에서 아시아로 옮겨지고 있었다.  

이제는 이 살아있는 촛대가 대륙과 대륙의 이동이 아닌 전 세계 각 지역교회 차원에서 그 복음의 빛이 다시 밝혀져야 한다고 본다.

30년간 선교지에서 가장 뼈 아픈 깨달음은 이것이었다. 선교는 선교사가 아닌 교회의 사명이며 교회의 존재 이유이기고 하다. 선교를 감당해야 할 교회가 복음의 능력을 잃어버리고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할 때 선교 현지에서 복음을 외치며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모든 헌신이 헛된 수고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무슬림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가장 많이 듣는 반박은 교회와 기독교인이 많은 너희 사회는 그리고 가정은 왜 그렇게 무너지고 타락했냐고??? 더 이상 우리가 전하는 복음에 매력도 신뢰도 가지지 못하는 그들 앞에 우리의 변명은 궁색할 뿐이다.

그동안 교회는 선교사를 파송하고 기도하며 후원하면 그것으로 교회는 선교적 사명을 다했다는 안일한 생각 속에 갇혀 있었던 것은 아닐까? 교회가 복음의 삶을 살아내며 하나님 나라에 가치를 보여줄 수 있을 때 선교는 능력있게 세계 복음화를 위해 달려갈 수 있을 것이다.

“잃어버린 죄사함의 복음”을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회복을 하게 된다면 이런 회복된 교회를 통해 우리가 꿈꾸던 전 세계 복음화는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지고 완성되어 지리라 믿는다. “교회가 교회되게” 이것이 선교의 시작이요 완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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