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마 11장 20-30
주제: 회개에 이르는 길
지난 주 만남에서 우리는 지금 교회 안과 밖에서 “죄사함의 복음”의 위기를 맞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최근에는 십자가는 우상이고 부활이 복음이라면서 부활만을 강조하는 부활의 복음이 춘천 어느 교회에서 시작되었는데 이 교회는 수 많은 간증을 말하고 있지만 죄사함의 간증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라는 것 이런 간증입니다. 다른 복음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 보혈 복음입니다. 언뜻 들으면 예수님의 피의 복음인 것 같지만 피는 강조하지만 죄사함의 복음은 빠져있습니다. 그들은 예수 보혈 보혈 보혈하면서 보혈기도를 한다고 하지만 죄사함의 복음을 약화시키는 우려를 범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에 성경에서 말하는 죄의 개념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잠깐 다시 요약하자면 이방인의 컨셉이 아닌 유대적, 성경적 개념의 죄에 대해 말씀을 드렸는데 죄란 헬라어는 ‘하마르티아’라고 하는데 이것은 흥미있게도 이런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표적(하나님의 영광이나 하나님이 아담에게 제시한 삶의 표준)에서 화살이 빗나가다, 실패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죄의 개념은 모두 사람의 사사로운 개인의 죄들이 아닌 모두 “하나님”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영광도 삶의 표준도 알지 못하고 살아온 죄을 말합니다. 특히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통해서 행하신 일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해서 결과적으로 믿지 못하는 상태 그래서 자기가 삶의 표준을 스스로 설정하고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죄의 개념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로마서 3장 23절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이 기준으로 보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한 상태임을 알게 됩니다. 실상은 우리가 회개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이 죄를 계시하신 하나님의 십자가 사건을 깨닫지 못했다라는 반증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 사건이 왜 우리에게 죄를 깨닫게 할까요?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갈1: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요일2:2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바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기에, 즉 우리 죄 온 세상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기에” 그렇습니다.
다른 면에서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것을 볼 때에 “내가 지은 죄들 때문에 심판을 내 대신 받으셨구나”가 깨달아 지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요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우리 믿는 자가 왜 심판에 이르지 않습니까?
예, 주님이 우리 대신에 십자가에서 심판을 받으셨기에 그렇습니다.
심지어 바울 사도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갈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으셨다라고요. 성경에서 ‘저주’는 ‘하나님으로부터 끝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제자 마태는 이렇게 간증하고 있습니다
마 27:46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이것을 요약하면 :
첫째,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
둘째, 우리가 지은 죄들 때문에 우리 대신에 심판을 받으신 예수님,
셋째,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께 아들로 다시 회복시키고자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으사 하나님으로부터 끝어 지신 예수님,
주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 사랑을 온 몸으로 보여주신 십자가, 유월절 저녁 예수님은 캄캄함이 오후 3시까지 덮고 있을 때, 그 시간은 성전에서 상번제로서 저녁 제사를 드리는 시간, 그 날은 바로 유월절이 시작되는 첫 날,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린양을 잡고 그 피를 집마다 문설주 좌우에 발라가면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희생을 기억하고 찬양했을 것입니다.
그 날 그 시에 예수님은 십자가 상에 매달려서 이렇게 외치십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이 세상에 있는 영혼을 이처럼 사랑하시므로 왜 저를 버리시나이까?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들 예수님을 버리시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 이 아버지 사랑은 다음 시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이 바로 나의 죄 때문에, 내가 받을 형벌을 대신 받으신 것이며,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기 위해 잠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당하신 것이 깨달아 진다면 우리는 “회개”에 이르렀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죄를 깨닫고 고백할 때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도 회개에 이르는 죄사함을 얻었다 혹은 생명 얻는 회개를 하나님이 주셨다”라고…
이 죄사함을 위한 십자가의 고난을 깨닫게 된다면 우리는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데 그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아직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회개에 이르지 못하고 그 중간을 멤돌면서 세상과 교회 사이를 오고 가면서 이중적 삶”을 살아갑니다. 때때로 천국 시민으로 살기도 하지만 대부분 세상 시민으로 살아가는 것을 만족히 여기면서 일정한 거리두기를 하는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이런 그리스도인은 아직 회개를 하지 못한 상태라는 것입니다.
회개란 헬라어로 보면 ‘메타노니아’ 즉 ‘마음을 바꾸다, 다르게 생각하다, 다시 생각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회개는 잘못을 뉘우치고 끝나는 것에 있지 않고 돌이켜 다르게 살아가는 행동을 포함하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 주님이 회개하지 않는 마을들에 대해 화가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들 마을들은 대부분 갈릴리 호수 동 서편에 위치에 있습니다. 주님이 3년 반 동안 사역의 중심지였습니다.
베셋다출신 베드로, 안드레, 빌립 등 3명의 제자를 배출한 마을이었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예수님이 기적과 이적에 대해서 환영하고 치유받고 말씀을 들었지만 “회개”하지는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기적과 이적을 소돔이나 시돈, 두로에 베풀었다면 그들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했을 것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왜 회개에 이르지 못했을까요?
그 대답은 예수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을 단순히 병이나 고치고 기적과 이적을 행하는 사람으로 알았을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마을 유대 사람들은 날마다 안식일마다 선지자의 글들을 외우면서 혹시나 언제 오실지 모르는 “메시야”를 맞이하기 위해 기도와 예배의 삶을 살면서 열심히 “절기들”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을 숨기시고 말씀이신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오셔서 너희들이 기다리던 메시야 “바로 나야”하면서 사람의 아들로서 소경을 보게하며 앉은뱅이를 걷게하고 문둥이가 깨끗하며 귀머거리이 듣게하며 심지어 죽은 자들을 살리시면서 증거하셨는데도 이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마11: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아버지의 계시 혹은 아들 예수님의 계시가 아니면 예수님과 아버지를 알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았다고 하는 것은 어떤 기적이나 이적을 보고 아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 알아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계시의 종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계시된 것이 아니라 부모로부터 전수된 것이나 목사님이나 성경교사로부터 배워서 생긴 것이라면 “참된회개”에 이를 수 없습니다.
회개와 계시는 일직선상에 있는 것 같습니다.
회개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구약시대 때부터 특별한 은혜를 부어주셨습니다.
벳세다와 가버나움 마을들은 일부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분명 회개하지 않았기에 주님으로부터 “화가 있을 것이다”라는 책망을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회개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받고 아들 예수님을 그리스도 구주로 계시받는 유일한 길” 인데 우리가 복음을 듣고 어떻게 해야 회개하는 것일까요?
벳세다에는 베드로, 빌립, 안드레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회개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벳세다 사람들처럼 예수님의 기적과 이적을 경험하고 환영하고 유익을 많이 보았지만 예수님을 믿고 따르지는 않았습니다.
그 당시 베드로나 형제 안드레나 빌립은 벳세다에서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벳세다 마을 사람들이 베드로나 안드레 빌립을 보고서 아마도 이렇게 말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저렇게 가족과 직업을 다 버리고 따라가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고 저런,,, 순진한 애들 같이 뭐 하는 거야?”
성경도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막10:28 베드로가 여짜와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예수님의 답변은 이렇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아마도 벳세다 가버나움 사람들은 ‘지혜롭고 슬기 있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어린아이를 말하는 헬라어 ‘네피오스’는 어린아이뿐만 아니라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제자들 혹은 순박한 자들을 가리키는 말로서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하나님을 의지하여 오직 하나님의 도움만을 구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참된 회개를 일부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상한 마음과 애통하는 마음을 주소서, 네 눈의 대들보를 보게 하소서, 다른 사람들에게 지은 죄를 깨닫게 하소서, 나를 깨뜨리시고 겸손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서서’ 라고 기도하는 것을 참된 회개라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기도나 회개의 개념은 틀리지는 않지만 보통 우리 이방인들이 회개라 함은 자기 자신에게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적 성경적인 회개는 어디까지는 그 초점이 자신의 죄와 연약함이 아니라 “하나님” 께 맞추어져 있습니다.
우리 이방인들은 죄와 세상으로부터 구원받는데 그 모든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데 유대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구원은 확정된 것이고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께 “순종”하여 거룩함의 열매를 맺을 것인지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무슬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참된 회개’의 정의를 이 말씀으로 드리겠습니다.
막10: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헬, ‘에피에미’로서 보내다, 놓아주다 떠나보내다)
마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헬, ‘아코로우태우’로서 제자가 되는 것 혹은 동해하는 것).
회개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함으로써 회개의 정의를 합니다.
빌 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loss for Christ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이상과 같이 “참된 회개”는 개인의 사사로운 허물과 실수 그리고 여러 가지 인격적 장애들을 가지고 회개하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줄 알고 그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 만을 따라가는 것이라고 정의를 내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회개의 싸인으로 주신 그리스도 십자가를 알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고 전적으로 그리스도만을 위해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러한 삶이 불가능하다고 보십니까? 사도 바울이나 가능하다고 느껴지십니까?
막 1:15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우리가 회개하고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 그리고 우리 안에 임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처음 회개하고 새벽기도를 하고 교회 밖으로 나와서 세상을 보니 제 눈에는 모든 것이 새롭게 보였고, 나무나 풀들도 바람에 흔들리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 같아서 같이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집으로 돌아간 것을 기억합니다. 그 때 저는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맛보고 오직 예수님 만을 따라살고 싶었고, 그분 이외에 다른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을 상상도 하기 싫었습니다.
내가 그분 만을 위해 살아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마음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이 세상나라 시민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이 땅에서 살아가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천국 시민이 모인 곳이 “교회 공동체”입니다. 하지만 일부 이단들을 제외하고는 이러한 천국 공동체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이단들의 특징은 구세주이신 교주가 이미 자기들 가운데 있고, 세상 모든 것을 버리고 교주가 만든 공동체로 들어가서 살아가는 모습이 종종 기사거리로 나오고 있습니다.
저는 죄사함을 통해 생명얻는 회개에 이른 다면 우리도 이런 초대교회가 이루었던 공동체가 가능하리라고 믿고, 이런 교회 회복을 위해 이 시간 같이 일어서서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