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도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2차 전도여행 때 방문하여 일년 반 동안 고린도에 머물면서 복음전도로 세운 교회였다. 또한 바울 이외에 다른 사도들과 전도자들에 의해 복음을 받은 고린도 교회는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는 교회였고, 그리스도의 증거와 간증들이 넘쳐나서 모든 영적 지식으로 풍성한 교회였다. 그리고 주 예수 강림을 간절히 기다리는 견고한 교회였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다시피 이렇게 영적으로 풍성한 지식과 은사가 있는 교회 안에 수많은 문제들이 있어서 고린도교회를 개척한 바울은 이러한 소식을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글로에의 집 편으로 듣게 됩니다.

교회 개척자로서 바울은 이 교회 안의 여러 문제를 해결하는 메시지를 쓰게 되는데 그 메시지의 핵심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내용이며 그 메시지는 바로 “십자가의 도”입니다.

누구든지 모든 영적 지식을 알고 믿음이 있어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성령의 은사가 있어 능력과 방언을 한다 하더라도 만약 “십자가의 도”를 모른다면 그와 그 교회에게는 사탄에게 속아서 분열되어 질 것이고, 육체의 정욕에 떨어질 것이며, 참 지혜가 없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참 복음을 알지 못한 자입니다.

바로 믿는 이의 삶 속에서 여러 문제가 일어나고 삶에 평안이 없을 때 이 “십자가의 도”가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키입니다. 만약 십자가의 도가 우리 삶 속에 부재한다면 우리 믿는 이 개인의 삶이나 가정은 늘 문제가 많을 것이며 평안도 행복도 멀리 달아날 것이고 사탄에게 속아서 여러 육체의 싸움에 떨어질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말하는 십자가의 도란 무엇인가?

많은 분들이 이 십자가의 도를 예수님이 우리 죄들을 십자가에서 용서해 주신 “죄사함의 복음”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13개 서신에서 “십자가”를 22번 정도 언급했는데 이 중 죄사함의 의미로 사용한 것은 한두 번 뿐이었습니다.

물론 4복음서에서 “십자가”를 언급할 때는 “대속의 죽음”의 의미로서 죄사함을 주기 위한 죽음으로 대부분 그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물론 예외는 있는데 그 구절이 바로 우리가 잘 아는 마태복음 16장 24절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복음서에 십자가가 죄사함의 의미가 아닌 다른 의미로 쓰여진 유일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하는 복음에는 죄사함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의 피로 우리를 구속하신 “죄사함의 복음”과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고 장사되었다가 삼 일 만에 죽음에서 부활하사 우리에게 산 소망을 주신 “부활 생명의 복음”이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죄사함의 복음에 대해서는 제가 지난 번에 증거해 드렸습니다. 지난 주에 부산의 큰 교회에서 세례식을 주고 그 중에 한 분이 대표로 나와서 간증을 하시는데 들어보니 “죄사함의 간증”은 없고 예수 믿고 삶의 변화가 일어나고 교회 가는 것이 좋아지고 등 등. 우리 한국교회에 죄사함의 간증자들이 일어나 주님에 대한 올바른 신앙고백이 드려지는 축복이 있도록 정말 기도하셔야 합니다.

그러면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이 말하는 십자가의 도의 의미를 살펴봄으로써 복음전도자로서 바울 자신과 교회 개척사역에서 일어나는 여러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해 갔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바울도 자신의 연약함을 안고 전도자의 삶을 살았고, 본인이 개척한 각 교회들에게 13통의 편지를 써야 할 정도로 여러 문제들로 그의 삶이 둘러 쌓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편지에서 바울의 고백과 가르침에서 “십자가의 도”를 어떤 의미에서 사용했는지 몇 구절들을 살펴봄으로써 알아보고자 합니다.

  1.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다(고전4:9)
  2. 우리는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같이 되었다(고전4:13)
  3. 차라리 불의를 당하고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한가(고전6:7)
  4.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다(고전6:12, 10:23))
  5.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전8:9)
  6.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라(고전9:18)
  7.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전9:19)
  8.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9:27)
  9.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
  10.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라(고전10:33)
  11.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12:27)
  12. 지혜에는 어린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고전14:20)
  13.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전15:10)
  14.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

이와 같이 십자가의 도는 죄사함의 의미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어찌보면 “자기부인 혹은 자기 부정이나 혹은 마땅히 누릴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는 것 혹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고 고백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4장에 가서는 바울은 이렇게 십자가의 도를 설명합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바울은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삶은 바로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 자신을 항상 죽음에 넘겨야 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 몸에서 사망이 역사할 때 그리스도의 생명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도”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에 가면 바울은 십자가의 도를 세 종류의 죽음에 대해 언급하면서 진리를 풀어주고 있습니다.

첫째,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여기서 십자가는 내가 즉 육신적 자아(ego)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두번째, 갈라디아서 5장 24절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여기서 십자가는 자아가 처리된 사람들은 그 정욕과 욕심도 죽었다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세번째, 갈라디아서 6장 14절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여기서 십자가는 세상에 대하여 죽었다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상과 같이 바울 사도는 십자가를 죄사함의 의미로 사용하기보다 “자기부인이나 십자가에 지금 메달리며 죽어가는 상태 혹은 십자가를 지고 가는 과정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십자가의 도Message를 설명하면서 구원과 연결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많은 분들이 이 십자가의 도를 죄사함의 복음으로 해석하고 인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구원은 죄사함으로부터의 구원이 아니라 구원을 이미 받은 믿는 이들이 십자가의 도를 실천하면서 살아간다면 모든 상황에서도 우리를 구원하시고 남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의 도에는 서로 다른 두 가지 개념이 공존하는데 그 하나는 “자기부인 혹은 자기부정(self-denial)”이며 다른 하나는 “자기 긍정(self-affirmation)”이다.

첫번째, 자기부인 혹은 자기 부정의 측면에서 본다면 주님이 지신 십자가입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대면하시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철야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이 고난의 잔을 거두어 달라고 탄원 하지만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게 하시고 이루어지게 하소서라고 세 번씩 이 기도에 집중하면서 기도하시는데 새벽이 되어갑니다. 기도에 집중하다 보면 한 가지 기도제목만 놓고 기도해도 몇 시간이 훅 지나가는 경험을 하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주님이 그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기 부인”의 공과를 배웁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면 십자가를 질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배우게 됩니다. 십자가는 주님을 구세주로 만나고 난 이후에 주어지는 것인데 먼저 자기부인이 있어야 십자가를 질 수 있는 것입니다.

보통 우리는 자기부인의 대한 말씀들은 많이 들었습니다. 예를들면 “나는 죽고 예수로 살자”, “주님이면 충분합니다”, “모든 것이 주의 은혜입니다”, “주님만 아시면 됩니다”,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 “더 이상 내가 산 것 아니요 오직 내 안에서 주님이 사십니다” 등 등.

두번째는 십자가의 도에는 자기부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긍정(십자가의 긍정)”도 강하게 나타나 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후서에서 나타난 자기긍정에 해당하는 절들을 모아보았습니다.

고전2:16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고전3:9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고전4:1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고전4:16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고전6:15 “우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고전8:6 “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

고전9:1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고전 9:17 “나는 복음전도의 직분을 맡았노라”

고전15: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고후1:22 “하나님이 우리를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고후2:14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고후5:20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한 대사(Ambassadors)이다”

고후 6: 1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들이다”

고후12:10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이와 같이 십자가의 도 안에는 자기긍정의 강한 측면이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 긍정의 말들을 자주 듣고 있는데 예를 들면 “나는 하나님의 자녀야”, “나는 구원받았어”, “나는 용서받았어”, “나는 하나님 안에서 축복받았어”, ”하나님이 나를 정말 사랑하셔”, “주님이 나를 부르셨어”,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나는 그리스도의 피로 자유를 얻었어”, “나는 천국 시민이야” 등 등. 실제로 자기긍정을 하루에 한번만 실천해도 자기긍정감이 높아져서 인생이 바뀐다는 심리적 통계나 이론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위에서 언급한 바울의 자기긍정 말씀들은 심리적이고 혼적인 말들이 아니라 영적이며 생명적인 말씀인 것을 제차 말씀을 드립니다.

다음 구절은 십자가의 도 안에 있는 자기부정과 자기긍정이 같이 나오는 구절입니다.

고후 6: 9-10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자로다”

고후12: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교회 여러분!

저는 지금까지 십자가의 도가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십자가의 도 안에는 자기부인과 자기긍정이

동시에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십자가의 도는 결국 “우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살아내기 위한 유일한 길인 것입니다.

믿는 자로서 때때로 자기를 부인하고 또한 때때로 자기를 긍정해 가면서 우리는 모든 상황

가운데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만을 나타내고자 한다면 우리는 십자가의 도의 진리를 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만을 위해 십자가의 도로 살아가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갑의 위치에 있어도, 혹은 을의 위치에 있어도 우리는 십자가의 도를 실행해야 우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가 살아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갑과 을의 위치에 우리는 처해질 수 있습니다. 특히 가난한 파키스탄 사람들을 대하면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있습니까?

구원하는 복음은 있는데 십자가의 도가 부재함으로 인해 그런 복음사역자 때문에 오히려 교회의

주인되신 예수님에게 욕을 먹게 하고 있지 않는지?

이번 주도 저와 여러분 교회가 십자가의 도를 실천함으로 우리의 주인되신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시는 복된 한 주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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