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d of God: John4:1-42
Subject: God is Spirit
들어가는 말
요한복음의 전체주제, 즉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은 20:31 Jesus is the Christ, Son of God이다.
사마리아 여인 스토리를 기록한 것도 이 주제를 기록하기 위한 것입니다. 부정한 여인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여인의 삶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기록함으로 예수님을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님이 직접 “자기 계시”를 하면서 “내가 그로라 하시니라”(26절)
이 말씀은 마태복음 11장 25~27에 기록된 것 같이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이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27) 했다.
아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알고 믿은 ‘사마리아 여인’은 참으로 복된 영혼이다.
예수님이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말하는 것이 복음의 선포이다.
하지만 이 복음을 증거하는데 있어 하나님을 소개함이 없다면 복음은 약하게 될 것이다. 반쪽 복음만을 전하는 것이다. 그래서 복음은 삼위일체로 전해야 완전한 복음이 되는 것이다.
아들 예수님은 당신을 계시하기 전에 먼저 “아버지”를 계시하신다. 즉 “하나님 아버지는 영이시다”라고 계시 즉 알게 하신다.
그러면 “하나님은 영이시다”라는 할 때 그것은 어떤 의미를 포함하고 있나?
첫째, 하나님은 아버지시다.
요한복음에서 아버지가 모두 134번 가장 많이 언급했는데 그것은 4복음서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그만큼 아들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 요한은 먼저 하나님을 아버지로 많이 소개하고 있다.
여기서 사마리아 여인은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말씀을 듣는다. 이 여인은 유대인의 주장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만 있는 것으로 반신반의하고 있었고, 감히 아버지로서 부르지도 못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은 예루살렘에만 갇혀 있는 분이 아니고 그분은 영이시며 이곳에서도 예배를 드릴 수 있다고 하는 말씀을 듣고 모든 문제가 순식간에 해결함을 얻게 되었다.
사실 이 여인의 삶은 그 어디에서도 만족함이 없었고 나름대로 다섯 번의 결혼생활을 통해 노력을 해 보았지만 헛수고였다. 그리고 만족도 없었고, 삶은 더욱 어려워져 갔다. 그리고 그 여인은 늘 마음에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잘 예배하여 내 인생의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심중의 깊은 문제를 지금 예수님으로부터 답을 얻게 되었다.
이것과 함께 하나님을 아버지로 소개받는다. 예배하는 대상이 그렇게 멀게만 느껴졌던 거룩하신 하나님이 바로 아버지라니 … 늘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 부르지도 못하고 하나님의 이름대신 “야훼(여호와 = LORD)”로 불렀었는데 그분이 나의 아버지라고 …
아마도 이 여인은 하나님을 아버지라는 말씀을 처음 들었을 것이다. 그동안 여인은 탕자와(코야후와 베타 = the lost son) 같이 아버지없이 이리 저리 헤매며 살아왔을 것 같다. 혼자 삶을 살아보려고 노력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바로 이 남자 저 남자 만나 혹시나 이 사람이면 행복한 가정을 세울 수 있지 않을까? 하면서 삶을 소비(퍼쥴)하고 있었다.
주님은 이 잃어버린 한 마리 양 인생의 길을 헤매며 위험한 길에 서 있는 이 한 마리 양을 만나 주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영이시고 바로 이곳에서도 그 하나님을 “아버지”로 예배할 수 있다는 복음을 전해주자 이 여인은 너무나 흥분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Rom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둘째, 영이신 하나님은 아들 예수님을 보내신 분이시다.
“여자가 가로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25절)
유대인들은 예수님에 대해 이런 말을 합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요9:29)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을 알지 못했다. 30년 전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때에 세례요한의 탄생이며 동방박사 이야기, 천사의 방문을 받았던 목동들의 간증은 이미 그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없어졌다.
이젠 막 세례자 요한의 간증을 듣고 사람들이 예수님께 찾아오기 시작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이스께 바워주드) 나사렛 고향 사람들은 “이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그 형제들과 누이들이 이곳에서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한가?”라고 하면서 믿지 못합니다.
많은 제자들도 예수님의 생애 마지막 때까지 하늘 아버지가 예수님을 보내신 것을 믿지 못했다. 그렇게 3년간 예수님을 따라나녔고, 기적과 이적을 경험했지만 아버지가 보내신 것을 믿지 못했다.
Joh 16:30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서 나오심을 우리가 믿삽나이다
Joh 16:3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지금 이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무나지)시며 하나님이 보내신 것을 믿고 있다. 예수님이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돌아가셨는지 아는 사람은 예수님을 아는 사람이요 예수님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람이다. 예수님 이외에 이 땅에는 “하늘에서 내려온 자”가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땅에 태어나신 것이 아니라 “임하신 분”(우뜨라- 출19:18)이시다. 마치 시내산에 하나님이 임하신 것처럼 말이다.
어느 누구든 예수님이 하늘에서 임하신 것을 믿는다면 그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Rom 10:6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Rom 10:7 혹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셋째, 영이신 하나님은 성령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를 받으시는 분이시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 어디서 어떻게 예배를 드리어야 하는지에 대해 말씀하신다. 그동안 유대인들의 예배는 ‘예루살렘’에만 국한시켰다. 이방인의 예배는 허락되지 않았다. 성전입장이 불가하였다.
그러나 주님은 이렇게 선포하셨다.
4잘 21절 “the hour is coming” 그리고 Joh 4:23 “But the hour is coming, and is now here”
주님은 지금 이 부정한 여인과 함께 예배의 혁명을 이야기하고 있다.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때가 왔다고 알리신다. 혁명적인 말이다.
지금까지의 예배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동물의 희생의 피로 드려져야 했었다. 이제는 짐승의 피나 제물로 드리는 예배의 때는 끝이 났고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때가 지금 왔다라고 선포하시는 것이었다.
성경은 ‘동물의 피의 제사로는 사람의 양심을 완전케 할 수 없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Heb_9:9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
Heb_9: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Heb_10: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나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사람의 양심을 완전케 할 수 없는 예배를 드리고 있었기 때문에 동물 제사만 가지고는 위선자의 삶을 살 수 있는 위험을 가지고 있다. 이런 예배를 드리는 자들에게는 “죽은 행실”로 표현되는 삶의 열매만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이들의 예베는 위선적이었다.
Mar 7:6 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여기서 주님은 하나님과 부모님를 ‘존경’(헬 티마오, 10절)하라고 했는데 유대인들은 말과 행동이 달랐다.
유대인의 예배는 입술뿐인 예배, 사람의 교훈에 기초한 예배였다. 지금도 이곳 파키스탄에서는 예배를 미신적으로 توہم پرستی 타와훔…드리는 사람이 많다.
신앙의 타락ایمان کا زوال decay, fall은 “예배”에서부터 온다.
예배에 있어 중요한 것은 “진실, 진리”이다. 마음의 진실이다. 위선적인 것은 배제된다(Excluded). With a true heart, without any allowed guile or hypocrisy. God is the searcher of hearts, and he requires truth in the inward parts. Sincerity is our gospel perfection. 신명기 6장 4~5절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예배)하라”
구약에서 예배의 의미는 아바드(abad)가 사용되었다. 이 언어의 뜻은 일한다(work), 노동한다(labor), 섬긴다(serve) 등의 뜻이 있다. 구약의 제사장이 성막에서 혹은 성전에서 제사사역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
신약에서 사용된 예배의 단어는 프로스쿠네오(proskuneo)이다. 이 말의 뜻은 ‘손에 키스하다’, ‘무릎을 꿇다’, ‘허리를 굽힌다'(kiss the hand and the ground toward)는 뜻으로 이는 예배자가 자신의 몸을 꿇어 엎드리는 외부적인 행위 뿐만 아니라 겸손과 사랑과 존경을 드려야 하는 마음의 자세를 말해준다.
우리는 신령과 진정으로(In spirit and truth=헬, aletheia) 예배를 드린다 라는 말을 잘 이해해야 한다. In spirit에서 In은 헬라어 “엔”으로서 신약에서 536번 사용되었다. 그리고 among, at, on, in, by, through, under, namely, when, while, way 등 모두 67의 다른 용도와 전치사로 쓰였다.
신령은 성령을 말하고 있고, 진리는 말씀이신 예수님을 말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성령과 예수님 안에서 혹은 성령과 예수님으로 혹은 성령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혹은 성령과 예수님 사이에서 예배를 드리라는 것이다.
요한복음 4장에서의 사마리아 여인의 예배는 ‘생수’living water(성령)과 ‘예수님(진리)’으로 말미암아 ‘예배’를 드리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온전한 예배의 결과는 ‘예수님을 그리스도, 구세주로 계시 받고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예배 가운데 성령의 생수가 흘러나오는지 혹은 성령의 임재가 있는지 알아야 하고 이러한 성령의 역사를 통해 예수님을 구세주로 알게 되어 믿음의 고백이 있었는지를 알아야 한다.
이러한 예배가 아니라면 우리는 유대인과 같은 죽은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이다.
결론
하나님은 영이시다라는 주제로 말씀을 드렸다.
영이신 하나님은 첫째,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그래서 복음은 삼위일체로 증거해야 한다. 영이신 아버지께 이제는 어디서나 언제든지 신령과 진정으로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음을 알았다. 둘째, 하나님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보내신 분으로 알았다. 보내신 분을 아는 것은 영생을 소유한 자이다. 셋째,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받으시고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는 하나님이시다. 이 사마리아 여인은 신령(= 생수)과 진리(=말씀이신 예수님)로 예배를 드리고 있다.
이런 예배의 결과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게 한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성령과 진리이신 말씀이 역사하도록 기도하면서 사모하는 해야 한다. 오직 성령과 진리의 말씀 즉 예수님을 의지해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
먼저 성령으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성령으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을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령 안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드린다는 것이다. 성령만이 아니라 성령과 진리로 예배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문장의 구조를 보면 성령과 진리 두 단어는 전치사 하나의 지배를 받고 있는 형태로서 동의어에 가깝다. 그래서 성령과 진리를 하나의 단어로 합해보면 “진리의 영”이라고 할 수 있다. 성령으로만 예배를 드리면 신사도와 같은 다른 영으로 미혹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기록된 진리의 말씀과 함께 예배를 드려야 한다.
진리로 예배를 드린다는 것도 진리 안에서, 진리 위에, 진리로 말미암아, 진리와 함께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진리이신 예수님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오직 예수님으로, 오직 예수님 안에서, 오직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드려지는 예배가 진정한 예배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배를 통해서 예수님을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로 만나는 축복이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