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키스탄 교회선교에 관하여
들어가는 말
2002년 파키스탄으로 들어와서 2023년까지 무슬림 선교와 펀잡인 크리스챤 교회 사역을 하면서 사역과 삶 가운데 주님이 함께 해 주신 여러 이야기들과 식견을 서술함으로써 선교를 돌아보고 앞으로 이곳에 남아 교회 사역을 하시는 사역자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글을 쓰고자 한다.
참고로 10년의 무슬림 사역에 대해서는 먼저 기도한 글이 있기에 이번에는 “교회사역”에 대해서만 나누고자 한다.
- 파키스탄 선교역사:
영국 식민지 통치아래 일어난 인도선교:
파키스탄 선교는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세 나라가 분리되기 전, 북인도선교와 함께 시작되었다. 1947년 8월 14일 힌두교를 믿고 있는 인도로부터 그리고 정치적으로는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하여 무슬림 중심으로 “이슬람 민주주의 공화국”으로 독립을 쟁취한 이후 1956년 “파키스탄 이슬람 공화국” 헌법이 제정되어 지금의 파키스탄이 만들어졌다. 분리독립 이 후 캐쉬미얼과 동파키스탄(방글라데시) 문제로 인도 파키스탄의 계속적인 전쟁으로 양국 관계는 앙숙관계로 발전하여 지금까지 이르고 있다.
인도 파키스탄에 선교를 시작한 교회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에 속한 캐톨릭교회(아우구스티누스회, 갈멜파, 프란시스코회, 도미니코회, 예수회 등)가 1509년 인도 점령을 시작으로 1760년까지 선교를 했지만 토착화 실패로 선교는 끝나게 되었다” 라고 결론을 내고 있다.
그리고 개신교 선교는 영국이 지배한 1757년부터 1957년까지 약 200년간 선교를 시작했는데 약 200 년 동안 영국 지배하에서 파키스탄 교회(1757-1957)에 대해 정마태 선교사는 이렇게 분류하고 있다.” 첫째, 영국 귀족들과 지배자들을 위하여 온 선교사들이었다. 이 영국 지배자들은 도시 중심의 캔턴먼트(Cantonment, 주둔지)라는 특별 지역에서 특권을 누리며 살았고 그 특별 지역에 이들을 위한 예배당이 별도로 있었으며 현지인들은 예배 참여가 제한되었다. 둘째, 영국 군인들을 위해 종사하는 군목들이었다. 셋째, 인도/파키스탄의 가난한 현지인들을 돕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선교사들이 있었다”
1793년 영국에서 윌리암 케리(William Carey)가 인도선교를 시작으로 진정한 의미에서 개신교 선교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불꽃과 같이 헌신한 영국의 위대한 선교사 헨리 마틴(Henry Martyn)이 1806년에 인도에 와서 ‘우르드어’로 신약을 번역 출판하여 인도선교의 초석을 놓았고 더 나아가 페르시아어와 아랍어 성경까지 번역하여 아시아 선교사역에 위대한 공헌을 하게 된다. 그리고 미국 장로교 선교부(PCUSA: Presbyterian Church USA) 소속인 죤 캐머런 로리(John Cameron Lowrie) 선교사를 첫 선교사로 파송하여 펀잡에서 사역을 시작하였고, 1855년 앤드류 고든(Andrew Gorden) 선교사가 그 뒤를 이어 시알코트(Sialkot)를 중심으로 사역을 전개하다 구즈란왈라와 북동쪽으로 사역을 확장해 나아갔다. 결과적으로 수 많은 선교사들이 동원되어 매년 세례자가 2,000여명, 기독교 마을이 380여 개, 현지 사역자(남,여)163명, 학교 127개 개교, 호스텔 남,여 2개, 신학교 1, 총 세례자 교인이 67,900여 명이 되었을 정도로 활발한 선교사역을 전개했다.(1885년 통계)
개신교 선교사역에 동원된 선교 단체는 형제 교단(The Brethren Churches)와 영국 성공회는 1850년부터 그리고 스코틀랜드 장로교단은 1857년부터 사역을 시작했다.
감리교는 1855년에 윌리암 버클러(Rev.William Butler) 선교사 파송을 시작으로 인도 북서부 중심으로 사역을 시작하면서 나중에 약 41명의 감리교 선교사들이 인도 전역에서 학교 병원 사역을 중심으로 사역을 전개하였다. 1885년에 인도 북쪽과 남쪽을 나누어 선교를 감당하면서 선교 보고된 자료를 살펴보면 북쪽에는 오다(Oudh District)구역을 중심으로 8개 구역으로 나누어 사역을 전개하고, 남쪽은 헤드라바드(Hyderabad)을 중심으로 수많은 선교사들과 교사들의 헌신으로 교회 학교 등이 세워지고 현지 사역자들과 교사들이 세워지게 되었다. 또한 고아들과 환자들을 돌보는 의사 간호사들의 사역으로 많은 열매들이 보고되었다.
하지만 파키스탄 토착교회가 세워진 것은 선교회의 헌신적인 선교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평범하고 다리를 저는 힌두교 달리트(Dalit) 카스트로 하류계층인 쭈라(Chuhra, 불가촉천민, the Untouchable)종족인 “디트(Ditt)”가 1873년 개인적으로 회심한 사건에서 시작된다. 낮은 카스트 쥬라 종족인 디트에게 복음을 전했던 것으로 알려진 “나투(Nathu Lal)”, 그는 1872년에 회심한 높은 카스트에 속한 사람으로 디트가 살고 있는 시알코트의 이웃 마을 사람이었다. 나투는 디트에게 복음을 전하고 영접하자 이 둘이 함께 시알코트 미국 연합장로교 선교회에 찾아와서 사무엘 마틴(Samuel Martin) 목사에게 세례를 받는다.
그리고 세례를 받은 디트는 목사의 권고를 사양하고 집으로 돌아가 핍박과 위협 속에서 믿음으로 싸우며 결국 3개월만에 아내와 딸 그리고 이웃 사람 둘을 데리고 세례를 받으러 시알코트 마틴 목사에게 세례를 받게 한다. 그리고 다시 6개월 후 4명의 친척을 데리고 와서 세례를 받게 하고 그 중에 한 명(Bro. KaKa)은 디트와 함께 복음을 전하게 된다. 11년 후 디트와 동역자들은 시알코트 지역에서 약 500여명을 전도하여 세례자를 얻는다. 13년 후 1886년에는 2,000여명의 세례자 중 1041명이 디트가 살고 있는 마을들에서 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1900년에는 쥬라 사람 절반이 개종하게 되었고, 1915년에는 쥬라 종족 전체가 개종하여 기독교인이 되었다. <Mass Conversion to Christianity, Chuhra Community in Sialkot District 1880-1930>, Huma Pervaiz, Tahir Mahmood
이와 함께 해외 선교단체들 즉 구세군은 1896 년에, 그리고 파키스탄 루터란 교회 (The Pakistan Lutheran Churches)는 1903 년부터 주로 북서 국경주의 무슬림들을 위해 병원을 통하여 사역하기 시작했다. 또한 개혁 장로교 선교부(ARP Mission: Associate Reformed Presbyterian Church)는 1906 년에, 오순절 교단 선교부 (Pentecostal Churches)는 스웨덴의 오순절 교단을 통하여 1943 년에 들어왔다. 그리고 이어서 TEAM (The Evangelical Alliance Mission, 복음주의연맹선교) 선교부가 1946 년에 미국으로부터 들어왔다.1
또한 1880년대부터 영국식민통치 정부는 “수로(canals)”를 펀잡 전 지역으로 확장하는데 있어 수많은 ‘쥬라’ 종족이 동원되었는데 이 때 많은 해외 선교단체들이 수로공사에 투입된 쥬라 종족과 함께 이동하면서 ‘선교적 영역확대’를 이루어 냈는데 이 때 쥬라 종족들은 그동안 힌두 카스트에 묶여 있던 사회적 신분과 제재를 벗어날 수 있는 기회로 활용했다. 사회적 신분 상승과 경제적으로 독립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선교단체들은 영국식민 정부에 요구하여 개종한 쥬라 종족을 위해 땅을 분배해 줄 것을 요구했는데 이 때 기독교 자치 지역들이 많이 생겨나게 되었다.
또한 1905년 시알코트(Sialkot) 장로교 선교사인 ‘존 하이드(John Hyde)’에 의해 일어난 ‘시알코트 회개운동’이 전개되어 매년 ‘시알코트 컨벤션’ 모임으로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처럼 다양한 선교회와 국내 회심자들로 인해 인도 파키스탄 분리독립 되기 전까지 활발하게 복음전도 사역이 파키스탄 아프카니스탄을 포함한 인도 전역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이 기간에 제 1,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고, 여기에 큰 재앙들이 들이 닥쳤다. 1899년 대홍수, 1902년부터 역병과 질병 기근이 일어났고, 1918년에는 아시안 독감이 펀잡을 강타하여 20년간 지속되었다.
- 파키스탄 분리 독립 이후의 선교역사
1947년 8월 14일 인도를 중심에 두고 동,서 파키스탄으로 분리독립 되었고 내전 때문에 1971년 12월 16일 동파키스탄은 ‘방글라데시’로 분리독립 되었다. 이 과정에서 무슬림과 힌두인들 사이에 내전과 같은 약 100백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천만 명의 난민이 발생하게 되었다고 한다.
파키스탄 현대 기독교역사(독립부터 지금까지)를 정마태 선교사는 다음과 요약하고 있다. 첫째, 독립으로 발생한 기독교 난민들은 핍박과 개종의 압박을 받았다. 둘째로 1950년 대 홍수, 1968년 1972년에 대 홍수 때 교회는 고통을 함께 받았다. 셋째 인도와 세 번의 내전으로 인한 기독교인들의 피해가 심각했다. 넷째, 이슬람화와 국유화다. 이 때 생겨난 신성모독죄(형법 295C 조)로 인해 법적으로 핍박을 받았고, 교회 소유을 강제로 국유화하는 바람에 남아있던 기독교인들이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되었다. 다섯째, 교회 내부의 새로운 행정 문제이다. 1970년대부터 선교사들의 지도력이 대부분 모든 파키스탄 단체와 교회의 현지 지도자들에게 이양되면서 재산 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이처럼 파키스탄 독립 이후 파키스탄 나라의 정치적 불안정과 경제적 어려움 또한 내전과 이슬람화와 국유화로 인해 파키스탄 교회는 일어날 수가 없었다. 또한 선교사들의 지도력을 인수받을 만한 준비가 없어 결국 자산 싸움에 휘말리게 되었고 선교사와 현지교회 지도자의 갈등심화, 현지 지도자들 사이에서 싸움, 타 교단과의 싸움, 이러한 치열한 싸움으로 인해 세상 법정에서 조차도 기피하는 사안들로 구별해 놓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방황하며 심지어 대다수 사람들은 미국 영국으로 이민을 가는 것을 유일한 소망으로 삼고 있다. 특히 1970 년에 개혁 장로교, 영국 성공회, 유럽 루터교, 감리교가 연합하여 “파키스탄 교회”(Church of Pakistan) 교단을 창설하여 전국 8개의 교구 혹은 노회(Diocese)로 나누어 사역하고 있는데 이 교단 안에서 일어나는 치열한 재산 법정 다툼은 지금도 계속 진행되고 있다.
총체적으로 파키스탄 근현대교회사는 핍박과 고난의 연속이었지만 하지만 말씀 가르침의 부재와 성경적 영적 리더쉽의 부재 그리고 꺼져버린 기도의 불씨로 인해 오늘날의 교회의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라고 본다.
2000 년대 들어서면서 신입 선교사와 현지 동역자들의 협력으로 새로운 교회개척을 활발하게 진행되었는데 이 때 FGA(Full Gospel Assembly)을 선두로 Zarephath Bible Institute(ZBI), 구즈란왈라 장로교 신학교 등 많은 젊은 사역자들이 지원하게 되면서 도시 농촌 등에 수많은 교회가 새롭게 개척되었다. 하지만 모범된 교회의 부재 혹은 목회자의 부재로 인해 많은 젊은 사역자들은 선교사들의 삶과 사역을 동경하게 되면서 지역교회의 성장이 멈추고 미션만을 위한 파라교회(Parachurch)들만 무성하게 일어나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선교사들과 현지 사역자들의 적극적인 미전도 종족전도와 다수인 무슬림 선교시도를 병행하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보이는 성과를 얻었지만 지속적으로 사명을 가지고 사역하는 제자들이 세워지지 못해(지역교회 리더쉽 부재) 또 다른 문제들이 일어나게 되었다.
현재 교회개척 형편과 상태: 파키스탄 북쪽과 발로치스탄(퀘타)
- 지역 목회자가 선교사들에 의해 프로젝트 사역 등에 동원되어 사역을 하다 보니 지역교회 리더쉽이 약화됨.
- 현재 지역 목회자들 대부분은 선교사의 사역과 삶을 사역자의 모범으로 삼았기에 지역 목회자의 사역이나 삶이 부재
- 과거나 지금도 신학교 교육을 제외한 교회 안에서 “제자훈련”의 훈련부재로 인해 거의 모든 교회가 시도를 하지 못하고 있고, 상대적으로 각종 성경공부, 세미나나 집회는 많아졌다.
- 젊은 사역자들의 도전은 사역을 사업같이 혹은 사업을 사역같이 하는 모습을 가지고 있다. 신생교회 많은 사역자 목회자들은 생활고로 인해 Two Job을 하고 있다.
- 대부분 많은 젊은 목회자나 사역자들이 설교나 성경공부를 위한 교제가 부족하고 또한 서구 유명 인사들의 설교나 영상을 복사하는 경우가 많다.
- 젊고 유능한 크리스챤들의 사회적진출이 종교적 이유로 제한되어 있어 교회 개척 사역으로 몰리고 있고 상대적으로 교인쟁탈전으로 옮겨 붙고 있다.
- 교회개척은 주로 젊은 층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대부분 기독교 마을 안에서 또한 기독교 집단 거주지역에서 이루어지고 있기에 포화 상태에 직면해 있어 목회자의 가치나 평판이 점점 감소되어 가고 있다.
- 신생교회에서는 가족 중심형의 교회 행정이 기존 교회에 비해 약해져 있지만 파키스탄 교회 행정 대부분은 “교리 장정”에 따라 이루어지지 않고 있고 가정교회식 가족행정을 하고 있다.
- 교회 안에 또 다른 사회적 조직을 만들어 교회 행정과는 별도로 운영되고 있는데 회원과 회비를 관리하고 여기서 목회자나 행정인사들에게 사례비를 주고 있다. 상대적으로 신생교회는 전적으로 교회 헌금을 의지하며 운영하고 있다.
- 신생교회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교회는 ‘교리 장정’을 가지지 못하고 있고 교회 직분자 안수나 세례문답이나 성찬 등 행정양식 없이 보통 타교회나 오랜 전통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다.
- 파키스탄에서의 교회개척
- 의의: 교회개척의 정의
계란이 먼저냐 혹은 닭이 먼저냐의 물음 속에 한국이나 파키스탄 교회개척을 하는데 있어 동일한 물음과 진단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즉 제자가 먼저냐 아니면 교회 건물이 먼저냐를 놓고 ‘개척’의 정의를 내리는 것에 이슈화가 종종 되고 있다. 특히 크리스챤 칼로니로 살아가는 파키스탄에서는 ‘교회 건물’만 있으면 저절로 개척이 된다는 생각들이 자리하고 있다.
사도행전으로부터 교회개척의 정의를 찾는다면 사도행전 2장으로 시작된다고 본다. 특히 이방인 교회를 개척하는데 있어 사도행전 8장 빌립으로 세워지는 사마리아 교회개척, 10장에 가이사랴 교회개척, 11장에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에 교회개척, 13장부터 바울 일행이 아시아와 유럽지역에 교회개척 등을 살펴보면 모두 성령사역이 중심이 되어 교회개척이 이루어졌다. 물론 전하는 자들의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그리고 하나님 나라”가 메시지의 중심이었고, 성령과 교회가 함께 사도행전 28장까지 전하고 증거하는 일에 힘쓰게 된다. 교회개척의 3가지 요소가 있다면 먼저 전도자가 있고, 준비된 영혼들이 있고, 성령의 역사가 항상 같이 등장하게 된다. 그래서 교회개척의 정의를 내려본다면 “준비된 영혼들을 위해 준비된 전도자가 가서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죄사함의 복음을 전할 때 성령님이 역사하여 여러 기적과 이적 그리고 듣는 자들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하고 주는 그리스도, 구세주임을 고백하는 무리들의 모임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도행전에서 대부분 가정집에서 개척이 이루어졌다. 에베소 두란노 서원과 감금된 집을 제외하면 대부분 가정집에서 전도와 개척이 이루어졌다. 장소에 구속됨이 없이 교회개척은 가능하다고 본다.
- 도시에서 교회개척(파키스탄 북쪽 상황을 중심)
영국통치 기간에 대형 도시들에 세워진 큰 교회건축물로 인해 지금도 주변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선교사에 의해 세워진 교회는 대부분 웅장하고 큰 건물에 비해 신생 토착교회는 작고 협소하다. 물론 지금도 선교사들의 후원으로 인해 곳곳에 큰 웅장한 건물들이 세워지고 있다. 도시 개척의 경우는 대부분 사역자 가정용 집을 임대하여 시작한다. 혹은 사역자나 개척멤버들이 재정의 여력이 되어 집을 임대하여 예배용으로 개조, 개척을 시도하기도 한다.
파키스탄 크리스챤은 대부분 친인척, 같은 고향사람, 주변에 크리스챤 엔지오 기업인 병원, 학교 등을 중심으로 직장을 얻어 살아가는 그룹들이 공동체 형태를 가지고 한 곳에 같이 살아가기 때문에 이런 공동체 안에서 건물만 주어지면 대부분의 개척은 바로 된다. 하지만 크리스챤이 없는 지역이나 도시에서 교회개척의 소식은 아직 들어보지도 보도도 된 적이 없다. 북쪽 길깃에서 교회개척도 ‘직장과 사업을 위해 길깃까지 들어온 펀잡인 크리스챤’을 위한 것이었다.
이들에게 있어 교회개척은 “전도”의 개념보다 “특정 장소에서 새로운 모임”의 의미가 강하다. 최근에는 무슬림 종족인 ‘하자라 종족’이나 타 종교에서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 믿는 소수의 무리가 있어 ‘지하교회’ 형태로 모임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런 특별한 경우들을 제외하고는 펀잡인 안에서 교회개척의 의미가 ‘또 다른 새로운 모임’에 가깝다.
- 지역 교회 문제점들: 신생교회 중심으로
- 젊은 크리스챤 사람들이 무슬림 사회적 진출이 어렵기 때문에 교회사역을 하기 위해 사역자로 지원하고 있는데 이들에게 목회적 삶을 보고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없고 신학교에서도 ‘목회학과’ 신설이 없다는 점도 문제로 보인다. 젊은 사역자들은 대부분 선교사의 삶과 사역을 샘플로 삼기 때문에 지역 목회자로서의 삶과 사역이 절대로 부족하다고 본다.
- 목회자 검증 시스템이 약해서 누가 어디서 신학을 이수하고 안수를 받고 지원을 하는지 잘 구별을 할 수 없다.
- 사회적 신분계급의 상승을 위해서 고급 인력들(간호사, 엔지오, 교사, 공무원, 군인 등)이 정년퇴직을 하고 돌아와서 인생의 경험과 구축한 인맥을 통해 친인척을 중심으로 개척을 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젊은 사역자들은 개척하기가 어려워지는 형편이다.
- 도시에서 개척은 현재 거의 포화 상태지만 직장을 따라 크리스챤이 없는 타 도시나 지역으로 잠시 거주하는 크리스챤들을 위한 교회개척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대부분 현지 직업을 가진 평신도들(준 사역자들)이 개척을 하고 있다.
- 대부분 도시 이민자들의 삶이 집을 임대하여 살기 때문에 ‘십일조’ 헌금을 하기 어려워 하기에 신생교회 사역자들이 생계문제에 큰 어려움을 가지고 있다.
- 신생교회 대부분은 정부에 새로운 이름으로 등록하여 개척을 시도하기에 교단을 하나씩 새워가는 형태이다. 그래서 교회 질서를 위한 장정/규정이 없이 개척 담임자 임의로 직분자들을 세워가기에 행정의 질서가 세워지지 않고 있다.
- 대부분 교회 행사가 교회와 교인을 위한 것으로 두려움의 이유에서 지역전도를 위한 행사가 없고 선교사들이 아니면 자체적으로 ‘전도’만을 위한 모임이나 행사를 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주변 무슬림들이 복음을 듣고 교회로 오지는 못하지만 다만 ‘선한 이웃’으로서 복음의 가교와 화해의 가교 역할을 나름대로 감당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 주일학교나 청소년들을 위한 사역자들의 관심이 상대적으로 적어 주일학교를 체계적으로 운영하는 교회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 선교사로서의 지역교회 협력, 개척을 위한 접근
- 펀잡인의 문화적 세계관 이해:
보통 혹은 대부분 현지 사역자나 지원자를 상대로 사역을 시작하는데 우리가 사역을 위해 접근을 시도할 때 펀잡인들의 대화방식을 이해하지 못해 서로 각자의 말을 하면서 시작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가치기준과 사역의 동기 등 자본 민주주의에서 몸에 익힌 문화로 접근하며 현지 사역자나 지원자를 훈련하지만 이들 현지 사역자들은 때때로 상반된 다른 개념과 가치을 가지고 우리와 사역을 함께 시작하는 것이 현실이다.
삶으로 경험한 펀잡 문화는 우리 유교적 기독교 문화보다 더 보수적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그만큼 보수적이면서 뛰어넘을 수 없는 카스트 문화적 가치와 함께 우리와 다른 삶의 시스템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이 문화적 차이를 얼마만큼 인식하느냐에 따라 ‘사역의 승패’가 좌우된다고 본다.
파키스탄 문화의 특수한 환경과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이해하고 평가하려는 태도가 요구된다고 본다. 즉 이 문화를 공유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문화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태도라 볼 수 있다. 각 사회의 문화는 그 나름의 고유한 특성과 가치가 있기에 문화 간의 우열을 가리는 것은 위험하다고 본다. 선교사는 문화에 대한 고정 관념과 편견을 해소하려는 객관적인 노력을 통해 문화의 다양성을 이해하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본다. 하지만 문화 안에는 수 많은 비성경적 가치와 양식이 존재하는데 이것을 어떻게 외부 사람인 선교사가 문화적 가치 충돌을 피하면서 새로운 성경적 가치를 내포하는 삶의 양식을 전수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면 우리 한국인 선교사들이 현지인 결혼식과 파티 문화를 이해하지 못해 일어나는 오해도 많다고 본다. 정장이 아니고 대충 평복을 입고 종종 나타나는데 현지인 초청자는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만 무시당한 기분을 갖게 만든다. 시간 약속이며, 신실하고 성실한 개념이며, 공정의 개념이나 예의의 표현이며, 요구할 때 사용하는 대화법이며, 손님 초대 방식이며, 감사의 표시나 칭찬과 책망을 어떻게 하는지 등이다. 심지어 교회에서도 성경을 놓는 방식이며, 기도하는 하는 방식이며, 설교 방식 등 우리 한국과 다른 예배적 가치의 양식을 가지고 있다. 이들의 문화 안에 200년 영국 식민지 서구식 문화가 많이 배여 있는 것을 보면서 한국에서 경험할 수 없는 많은 고급스러운 문화를 체험하는 기회도 많았다.
파키스탄은 인도와 함께 서구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오랫동안 받아왔고 그리고 주변 나라들과 다양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수많은 언어와 종족 그리고 종교에 따라 문화와 전통이 다양하다. 우리가 가장 많이 부딪치는 문화적 영역 가운데 무슬림들과 크리스챤 모두 가지고 있는 몇 가지 찾아본다.
- 대가족제도
파키스탄의 문화에서 가장 큰 이슈가 있다면 “가족”문화라 본다. 가족의 경조사나 애경사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모든 일은 내려놓고 참여한다. 가족 간의 근친결혼을 선호해 왔기 때문에 결혼과 장례 등 가족사에 대한 참여도는 무척 강하게 나타난다. 처음에는 현지인들이 시시 때때로 가족사의 휴가를 요청하는 바람에 언어를 배울 때나 사역을 할 때 종종 이런 문제를 부딪치게 되면서 어려웠던 적이 많았다. 특히 파키스탄의 교회가 “가족교회”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 결혼 문화
파키스탄 결혼문화는 인도와 비슷하다고 한다. 보통 멘디(Mehndi), 바라앗(Baraat), 발리마(Valima)순으로 3일간 진행하는데 이것을 통칭하여 샤디(Shadi) 라고 말한다. 힌두 전통과 파티문화인 서구 문화가 믹스된 예식이라 볼 거리가 많다. 하지만 전통적인 이목과 과시를 위한 고비용 결혼으로 사회적 문제로 이슈되기도 한다. 이러한 혼인식 중에 선교사는 종종 초대받기도 하는데 가난한 크리스챤으로 생각을 해서 그런지 예식을 위한 정장 대신 깔끔하게 입고 가면 되겠다는 가벼운 생각 때문에 무례를 범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곤 한다. 또한 선교사로서 결혼식 문화를 성경적 가치로 바꾸어야 한다고 종종 말하면서 화려하고 고비용 결혼식에 약간의 ‘바른 가르침’을 주려는 순진한 마음도 있었다. 또한 결혼식에 보통 축의금이 따로 없고 음식을 먹고 축하하는 의미에서 ‘꽃다발’이나 ‘간단한 선물’을 주면 무난한 것 같다.
- 시장보기
보통 의식주를 통해 문화를 직접적으로 경험하고 부딪치게 되는데 그 중 하나가 가게에 가서 시장보기이다. 이들의 판매방식 가운데 두 세게 꼭 상한 것을 섞어서 판매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로 상거래를 한다. 처음에는 이런 일을 당하게 되면 화도 나고 속았다는 것에 마음이 많이 상하게 된다.
어떤 때는 가격을 더 쳐 줄 테니 골라서 살수 있도록 해 달라고 해도 판매를 하지 않겠다고 한다. 우리와 다른 상술의 보편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 길 물어보기
현지인에게 길을 물어볼 때가 많은데 대부분 사람들은 자기가 알지 못하는 길도 안내하는 경우가 많다. 즉 손님이 길을 물어볼 때 ‘모른다’라고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길을 안내 받고자 할 때 몇 사람에게 물어보는 것이 가장 좋다.
- 식사와 음식나누기
보통 가까워지면 서로 식사 교제를 시작하게 된다. 가장 가까운 단계에서 이루어진다. 무슬림이면 ‘할랄식품’을 먹고 있기에 우리 식사 초대에 어렵게 응대한다. 하지만 크리스챤들은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식사초대를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무슬림 가정을 초대할 경우 ‘할랄’음식으로 준비할 것이며 음식에 대해 충분히 설명할 필요가 있다. 사실상 ‘음식교제’가 회복되면 전도와 깊은 교제가 시작되어 가는 것을 경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일반적인 거리음식은 오픈된 양념을 사용하기에 조심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보통 따뜻한 “차이”나 로띠면 괞찮다고 보지만 그래도 주의가 필요하다.
- 현지 옷 입기
남자들보다 여성들은 현지 옷(Shalwar kameez and dupatta)을 두파타와 함께 외출복으로 애용할 것을 추천한다. 물론 입고 벗는 것이 번거롭고 불편하지만 현지 옷을 입고 밖에 나가는 것은 여러가지 의미가 다양하다. 첫째, 개인적인 보호다. 현지 옷을 입지 않고 나가면 ‘오픈된 여자’라는 잘못된 인상을 주게 되므로 꼭 입고 다니는 것이 좋지만 일반적으로 큰 도시에 정착하여 사시는 분은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옷을 선정하여 입을 수 있다고 본다. 둘째, 존중을 받는다. 현지 옷을 입고 현지인 집에 초대되어 가게 되면 대하는 태도가 달랐다. 곧바로 가족적인 친분을 표시하는 것이었다.
- 펀잡 사역자의 마인드를 이해하기:
선교사가 펀잡인을 상대로 제자훈련이나 성경공부 혹은 지도자 훈련 등을 시도하려 할 때 펀잡인 마인드 이해없이 곧바로 ‘사역’에 올인한다.
하지만 먼저 선교사(한국, 아시아 선교사들)가 이해하고 반듯이 알아야 하는 것은 이들 파키스탄 사람들은 수 백 년 전부터 서구 선교사들로부터 ‘배움’을 받아온 역사를 가지고 있고 서구 선교사들의 삶과 사역을 옆에서 배워온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들에게는 ‘아시아’ 선교사들로부터 ‘새로운 가르침’을 기대하는 것이 어려워하는 것 같다. 특히 서구 선교사들과 같이 유창한 영어가 되지 않은 아시아 선교사들을 만나면 그런 인식이 더욱 짙게 나타난다. 그것은 교육받지 못한 선교사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한국 선교사로 이곳에서 경험하는 것은 이들이 아시아 선교사들과 서구 선교사들 사이에서 분명한 ‘차별적인 대우와 태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종종 경험하곤 한다.
이들은 우리에게서 배우려고 다가오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내가 배워주는 것이며, 들어주는 것’ 이라는 태도를 가지고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들은 서구 선교사면 몰라도 아시아 선교사들에게는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존경(Respect)”는 태도를 갖기 어렵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우리 한국 선교사들에게도 많은 재정과 프로젝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나름대로 적당한 예의를 갖추고 대하면서 여러 듣기 좋은 칭찬을 한다. ‘당신은 다른 선교사님들과 좀 다른 것 같다, 진짜 선교사인 것 같다, 하나님이 기도해 주셨는데 응답으로 선교사님을 만나게 된 것 같다, 환상을 보았는데 …. 등 등 이들은 많은 미사어구를 통해 우리 선교사들의 환심을 사는데 모든 것을 이용한다. 심지어 선교사들에게 치유기도를 부탁해서 기도를 받으면 낳았다고 하면서 ‘선교사님은 기도를 많이 하시는 분인 것 같다’ 라는 연출도 한다. 이들은 마치 우리들에게 시니어 선교사와 같이 간접적으로 사역의 모양과 방법을 가르치는 “유모”와 같은 역할을 하고 오히려 우리가 당신 아시아 선교사들을 돕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초년 선교사들은 오히려 여러 사역 안내도 받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사역이든 곧바로 ‘재정지출’으로 이어진다. 특히 이들은 더 많은 사역을 하도록 열심히 선교사들을 안내한다. 심지어 우리 선교사들이 한국교회 후원자들에게 더 많은 선교보고를 할 수 있도록 여러 방면의 사진들까지 찍어 주기도 하고 기도나 사역의 제스처도 취해 준다.
마치 이들은 선교사를 돕는 “가이드”역할을 해 주는 것이 서로 좋다고 생각하는 듯 하다. 그리고 사역이 진행되어 감에 따라 그때부터 자기의 필요, 가정과 자녀학교 병원 차량 건축 등 여러 필요를 알려주면서 도움을 받아낸다. 선교사는 처음에 이런 요구를 받게되면 당황하겠지만 나중에는 설득을 당하게 되어 사역을 위해서는 도움을 주어야 되는 상황으로 이해한다. 그래도 움직이지 않으면 관련된 성경말씀을 가지고 보여주면서 암시를 주기도 한다. 그리고 반응을 하지 않으면 “죄”라고 지적하면서 나쁜 사람으로 인식한다. 즉 우리가 당신의 사역을 위해 동원되고 당신의 후원을 받는데 도움을 주었은즉 당신도 우리와 우리 가정의 필요를 돕는 것은 당연하다는 논리이다.
즉 사역이 주고받는(Giving and Taking) ‘사업’의 모습은 아니지만 선교사는 늘 재정지출에 압박을 받고 현지 사역자는 늘 재정 도움의 요청을 여러 모양으로 해 오기 때문에 나중에는 지쳐버린다. 심지어 현지 사역자들 가운데 선교사로부터 재정의 도움을 받아 필요한 것을 얻지 못했다면 약간 부족한 사람으로 취급한다고 한다. 그들이 모이면 선교사들로부터 얻어낸 것들을 자랑하면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다’라고 말한다.
특히 이곳 파키스탄에서는 여성(특히 독신 여성 선교사)들이 남성 현지 사역자에게 옳고 그름을 낱낱이 따져 묻는 것은 무례함으로 여긴다. 이슬람의 영향으로 인해 ‘명예’에 걸린 것들은 남성 사역자라도 조심해야 한다.
또한 비자 문제인데 비자가 이들의 손에 의해서 얻게 되고 연장되는 것이라면 이들은 이것을 100%로 이용하여 사역과 삶에서 무언의 압력을 행사한다. 시니어 선교사들은 앞 뒤 정황을 잘 파악하고 타협점을 찾아 대처해 나아가지만 초년 선교사들에겐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위에서 언급한 내용은 그동안 선교를 받아만 보았지 선교를 해야 하는 입장에 서 보지 못한 이들의 연약한 믿음을 먼저 이해하고 소모전이나 시행착오없이 복된 사역으로의 접근을 위해 나누어 보았다.
지금까지 우리가 경험한 이러한 것들은 이들에게 있어 심각한 문제가 있다거나 혹은 믿음이 없다거나(나름대로 대단한 믿음을 가진 자도 많음) 혹은 신실하지 못한 행동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시비가 발생할 때 나중에 우리가 앞뒤 정황을 말하고 현지 사역자의 잘못을 말하고 나면 우리 앞에서는 “Yes 하면서 현지 사역자를 나쁘다”라고 하겠지만 뒤로는 “자기들이 유익을 얻고 있으면서”라고 하는 소리를 듣게 된다.
또한 사역함에 있어 재정지출을 해야 하는데 서구 선교사들은 조건만 맞으면 따지지 않고 지출을 하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우리 아시아 한국 선교사들은 재정의 지출에 민감하기에 물건과 영수증 하나 하나를 점검하고 아끼면서 재정지출을 하는데 이러한 모습은 현지 사역자들로부터 “나쁜 선교사”라는 평판을 듣는다. 대충 가격담합 형식으로 해서 현지 사역자들이 뒤로 챙기는 수고비까지 점검하기에 “많이 후하게 주는 선교사는 좋은 선교사고, 따지고 영수증을 가지고 일일이 검사하는 선교사는 나쁜 선교사”라는 말을 듣는다.
7. 교회 개척을 위한 순서
1. 준비된 사람을 만나는 것
크리스챤 펀잡인들 모두가 대상이겠지만 그 중에서 교육을 받고 어느 정도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선교사를 만나서 삶의 출구를 찾는 사람들이었다.
우리가 일부러 선교사라고 하지 않더라도 이들은 거의 본능적으로 우리가 선교사라는 것을 알아버리고 그때부터 모든 것을 우리에게 집중하여 교제 세우기에 힘쓴다.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또한 자기가 누구이며 네가 원하는 사역을 얼마나 해 줄 수 있는지를 알리는 시간으로 서로의 탐색시간을 약 6개월 정도 혹은 일 년 정도의 교제를 한다. 이 기간에 선교사는 이들을 여러 가지로 파악하고 맞다 싶으면 바로 “사역”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 때 우리 선교사는 선택한 제자로 세우고자 성경공부나 어떤 훈련을 할 수 있는데 거의 만족을 얻게 된다. 이 때 우리가 듣기 좋은 소리와 함께 소위 간증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우리의 마음을 사고자 무척 애를 쓰는 기간이다. 그리고 선교사는 이러한 보여주기식 변화를 확인하지 못하고 곧 교회개척을 시작하게 되고 현지 사역자는 대 만족을 하게 된다. 물론 기본적인 언어를 배워 대화정도만 할 수 있으면 제자사역은 어렵다고 본다. 그래서 언어습득에 시간을 많이 투자하고 마음의 언어들을 알아들 수 있는 실력을 가져야 가능하다고 본다.
본인도 보여주기식 변화를 인식하지 못하고 큐티훈련과 제자양육, 금식운동, 새벽기도, 철야기도 등을 이어갔지만 이것은 “선교사의 축복”을 받기 위한 하나의 “선교사 과거시험”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따라왔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기대하는 속사람이 변화된 것은 지금도 없다.
2. 훈련을 마치고 사역을 시작
본인은 “주일학교” 사역부터 시작했다. 현지 중형교회 주일학교를 섬기면서 교사를 훈련시키고 관심있는 일부 교회 사역자들과 교제를 넓혀 나아갔다. 또한 지역교회 주일학교를 섬기면서 교회학교 관심을 이끌어 보려고 노력했었다.
나중에서는 가난한 도시빈민 크리스챤들이 모여사는 곳에 집을 렌트하여 현지 사역자와 함께 학교를 시작하면서 매주 주일학교만을 하게 되었다. 평일 학교에서는 학업 이외에 방과 후 학교를 운영하면서 여러 프로그램을 운영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주일학교 교사훈련’이었다. 이 훈련 과정에는 ‘일대일 제자양육’ 교제를 가지고 교제 강의와 교제 필기와 정리 그리고 실습까지 약 1년 6개월 정도를 하게 되었고, 끝나고 성경 통독훈련과 암송훈련도 같이 병행하였다.
이러한 훈련을 마치고 지금은 ‘QT 훈련’을 통해 만나고 있고 주일학교 예배사역에 참여시키면서 나름대로 은혜 생활을 하도록 인도하였다. 그런데 정작 삶의 변화를 기대했던 목사 사역자는 변화가 없었는데 어린 교사들이 변화하면서 자신감이 생기고 예배인도와 찬양인도 기도회 인도를 은혜롭게 인도하는 훈련된 크리스챤으로 변화가 되었다.
약 3년의 훈련과정을 하면서 처음에는 16명 정도가 시작했는데 지금은 4명만이 남아 사역에 임하고 있다. 그리고 새로운 그룹을 만들어 성경훈련을 시작하고 있다.
어른들을 향한 사역 혹은 목회는 북쪽 길깃(Gilgit)에 있을 때와 이슬라마바드 지아머짓 슈큐리야에서 3년을 현지사역자와 동역을 해 보았다. 새벽기도회와 다양한 금식기도 그리고 철야기도까지 여러 사역을 적용해 보았다. 순수하게 따라오는 교인들은 변화의 모습으로 나아오는 것 같았는데 목회자나 리더들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어서 그런지 주어진 사역들은 하지만 늘 준비가 되지 않았고 한 영혼 한 영혼에 대한 관심보다 보여주기 위한 프로젝트와 자기 목회에 직접적인 유익에만 생각이 빼앗겨 있어 상대적으로 도전을 받지 못하고 배우지 못했다. 특히 교회 부지나 건축 혹은 건물에 모든 생각이 빼앗겨 있었다. 여러 교회들의 사역 약 10여년 간을 하면서 가르치고 또한 배워가면서 복음의 씨를 기도와 말씀으로 열심히 뿌렸다. 물론 기대하는 열매는 아직 나오지 않았고 가능성도 희박해져 간다. 그러나 믿음으로 이들을 주님께 맡기고 나간다. 이들이 언젠가는 변화여 주의 사람들로 세워지는 꿈을 믿음으로 바라본다.
- 사역의 장애물들
- 가난과 문맹
2023년 현재 도시 크리스챤들은 어느 정도 가난과 문맹에서 벗어나 나름대로 생존싸움에 벗어나서 가정 형편들이 개선되어져 가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농촌 시골에서 무작정 상정하여 도시빈민으로 살아가는 있다. 나름대로 사역자들은 신학교나 기타 기관에서 배웠고, 여러 사역 경험도 가지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약 10년전만 해도 도시빈민을 상대로 ‘문맹퇴치’ 일환으로 우루드(국어)교실을 오픈했었는데 지금은 대부분 도시 일터장에서 우루르를 사용하기 때문에 쉽게 우루드를 어느 정도 익히며 살아가고 있다.
한 집을 임대하여 방 하나씩 한 가정이 살아가고 있었고, 공동 화장실과 물 때문에 서로 간에 힘들게 살아가고 있었다. 아이들 학습에 필요한 기본환경이 없었고, 학비도 제대로 내는 아이들이 많지 않았다. 이들 집들을 같이 심방하다 보면 사역자는 재정부담을 준다. 그래도 내가 돕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것을 확인하면 때론 성경말씀을 보여 준다. “내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
다행이도 학교 교장으로 있었던 현지 사역자가 가난한 크리스챤을 위한 사역을 이해하고 있어 매달 임대비만 도와주면 본인이 믿음으로 성실하게 잘 운영해 가겠다고 했다. 주님께 기도하면서 학교운영을 성실히 한 결과 아이들도 많아지고 학교도 조금씩 개선해 나아가면서 지금은 거의 도움 없이 “자립”을 해 가고 있다.
- 게으름과 비전
도시빈민의 삶이 힘들고 지친 삶의 연속이다. 유일하게 교회가 문화활동을 할 수 있은 장소이고 아이들이 마음 놓고 만나고 정보를 교환하고 학교와 교회의 여러 행사를 즐길 수 있는 곳이다. 그래서 매일 반복되는 지친 삶의 궤도에서 무엇을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사역자가 말씀으로 위로하고 비전을 주는 메시지를 주지도 못했다. 이 상황에서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은 “기도” 밖에 없었는데 그래서 시작한 것이 ‘새벽기도’였다.
하지만 늘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이들의 문화적 습관 때문에 어려웠지만 처음에는 차를 몰고 다니면서 새벽기도에 동원하는 것이 저에게도 큰 도전이었다. 지금은 현지 길깃교회 사역자가 스스로 몇 몇 성도들과 새벽기도회를 하면서 훈련받게 해 주심에 대해 뒤 늦게 감사하고 있다. 새벽기도회를 진행하면서 사역자들의 간증과 교인들의 간증이 이어졌지만 현지 사역자들에게 인계하고 맡겼을 때 여러 이유를 들어 지속하는데 실패했다. 현지화 혹은 토착화를 시키지 못해 아쉬움은 남아 있지만 사역자들과 교인들의 생각 안에는 “하면 좋다”라는 것을 경험하게 했다. 그럼에도 새벽에 일어나 크리스챤 빈민 마을에 들어가면 한 두 가정에서 일어나 기도와 찬송하는 소리가 들린다. “주님, 이 땅에 추수꾼을 보내어 주소서!”
사역자들의 ‘게으름’이라 할 까? 제자사역이나 설교를 할 때 보면 거의 준비없이 하는 경우가 많다. 충고와 권면을 하면 그 때 뿐 … 이유가 많이 있겠지만 ‘따라하는 것’은 잘 한다. 하지만 사역을 인계하고 내가 나타나지 않으면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간다. 선교사가 있으면 사역은 하고 없으면 그만 … 그 어떤 사역이든 모든 결과는 똑 같았다.
이 중에 재정 프로젝트 사역인 ‘학교사역’은 그래도 유지되고 있어 다행이다. 수입이 생기는 직업적 프로젝트라 그런지 이 학교사역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하는 것을 보았다. 지금도 이 학교사역을 통해 여러 교회 사역을 진행하고 있지만 별 관심을 갖지 못하는 것 같다. 오직 한 가지에 목숨을 거는 것을 보는데 바로 ‘대지 구입이나 건축’이다.
- 경조사와 교회행사
현지 사역자들은 경조사(장례, 결혼)가 있으면 사역을 제쳐 놓고 예외 없이 휴가 가는데 처음에는 이해가 안가 대화를 수십차례 했다. 지금은 그래도 사역을 위해 일찍 일찍 돌아와 사역을 해 가고 있지만 멀리 카라치 같은 도시로 가게 되면 주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간다. 또한 교회의 여러 행사, 성탄절 부활절 세미나 학교 행사들을 통해 자기의 존재감을 들어내는 것에는 민감하다. 이러한 것들 때문에 예배를 형식적으로 잠깐 드리고 곧바로 행사를 시작한다. 대부분 행사를 하게 되면 온갖 장식을 하게 되는데 이런 일에 대부분 시간과 관심을 쏟아 붓고 있다. 어떤 때는 교회 정규적 예배를 스킵할 때도 있다.
선교사가 경조사나 행사 때마다 재정부담을 갖게 되는데 이런 재정적 부담 때문에 늘 신경이 쓰였다. 이럴 때마다 경조사 참여의 열심으로 주님의 일에 열심을 가져 주었으면 하는 아쉬운 마음이 남아 있다.
- 가정사
사역자와 사역을 시작하게 되면 사역자 가정의 모든 일을 듣게 된다. 대부분 재정과 관련된 그 무엇들이다. 개인적인 일부터 아이들 교육과 출산 의료까지 그리고 형제 자매들의 가정 이야기들까지 너무나 많은 가족 형편들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때로는 소개까지 받는다. 사역의 지속성과 연계성 때문에 재정지출은 불가피하다. 그렇지만 어디까지 도와야 되는지는 그 때 그 때 주변의 케이스를 들어보고 기도하면서 결정하여 돕게 되었는데 지금은 많은 부분에서 가정사의 일들을 적게 나누고 부담도 적다. 그 이유는 여러 부분에서 도울 때마다 선교사가 도와야 되는 것이 어떤 것이고 당신이 책임지고 가정사 전반부를 스스로 알아서 결정해야 하는 것이 바른 것임을 계속적으로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다.
- 결론적으로 우리가 뛰어 넘을 수 없는 담이 있음을 발견한다. 그것은 현지 사역자와 사역을 시작하게 되면 사역자는 선교사의 사역을 해 주는 대신에 나와 가정의 필요를 채워주고 교회 건물까지 마련해 주는 것이 “합당하고 마땅하다”라는 컨셉이다. 이러한 논의를 여러 방면에서 시도를 해 보았지만 아직도 많은 부분에서 “남아 있는 것” 같다.
그리고 현지 사역자는 선교사 사역을 대신해 주어 선교사가 고국으로부터 ‘후원’을 받게 끔 도와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즉 당신은 우리 때문에 후원을 받고 있지 않나? 일부 현지 사역자는 이런 질문을 하면서 나에게 부끄러운 대답을 하도록 유도하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그런지 현지 사역자는 우리가 주고자 하는 죄사함의 복음과 십자가의 도를 받지도 깨닫지도 못했다. 오히려 사역 대상자들인 교인들과 아이들이 은혜를 받는 것을 보았다.
글을 마치면서
파키스탄 교회사역을 시작하면서 열심과 나름대로의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의 언어와 대화 소통에 대한 정보는 부족했고, 특히 펀잡 사역자들의 문화에 대한 문화적 이해는 상대적으로 낮았다. 찬송가가 대부분 우루드가 아닌 ‘펀잡어’로 되어 있었고 설교를 제외하고는 이들은 펀잡어로 소통하고 있었다. 또한 사역자들의 문화 사역적 언어를 이해하지 못해 불필요한 갈등 관계안에 있었던 것 같았다. 이들의 행동이 크리스챤 사역자으로서 비상식적이라 생각하면 이해를 하려고 하는 노력보다는 쉽게 판단하면서 다음에는 확실히 가르쳐야 하겠다는 생각부터 했었다. 지금도 이들의 사역적 삶의 문화를 다는 이해하지 못한다. 이들에게는 당연한 것이 나에게는 성실과 믿음이 결여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사역자에게 기술을 가르쳐 주기 보다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야 한다는 것과 ‘목자의 마음’이 중요함을 중심에 두고 가르쳐 왔다. 어느 정도 이들 사역자들 안에는 이러한 마음이 생기게 된 것을 듣고 보았다. 하지만 아직 이러한 마음에 ‘성령의 불 혹은 기름부음’이 없어 계속 기도하고 있다.
첫 교회사역을 하기 전에 ‘어른들을 상대’로 하는 사역들은 신분 상 어려움이 있었고 또한 어른들의 사역은 문맹과 가난의 장애로 인해 우리가 주고자 하는 말씀사역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래서 ‘주일학교’을 통해 사역의 비전들을 점차 넓혀 가기로 했다. 그러나 결국 현지 사역은 현지 사역자가 주체이고 선교사는 어디까지나 ‘보조’였기에 펀잡인의 사역자 문화 한계를 경험 했어야 했다. 비만 오면 홍수나는 도시 빈민촌을 오고 가면서 매번 빠지고 막힐 때마다 위험했지만 주님의 위로가 있었고, 지금은 수로나 길도 고쳐져서 교회를 오고 가는 것이 어렵지 않게 되었다.
때로는 이들 사역자들 함께 먹고 자고 하면서 개인적이고 사소한 이야기들 가정의 배경들 또한 살아온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친분을 쌓아갔고, 전도 여행도 하면서 한 팀웍을 경험하는 시간도 많았다. 이들의 평범한 일상이 나에게는 불편하고 어려웠지만 사역자들의 삶을 나누는 소중한 기회로 생각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때로는 몇 일 금식도 같이 하면서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철야하면서 밤을 새기도 했지만 함께 현지 음식을 풍성하게 먹었던 것이 좋았다.
아직도 ‘돕고 협력하는 선교사로서 현지 사역자와 사역을 어디까지 도와야 하는지 그 경계를 매 순간마다 주님의 인도를 받고 결정하는 것이 가장 큰 어려움이었던 것 같다. 잘못하면 ‘선교사’가 이들의 ‘Helper’가 되어 선교사만 의존하게 만드는 실수를 범할 수 있고, 또한 사역과 사역자의 삶을 돌아보지 않는 매정한 일꾼으로만 보여질까 근심이 된다. 그러나 사역자나 현지인들을 도우면서 열매로 남은 것은 단순한 도움이 아니라 도움과 함께 이들이 “사랑”으로 도와주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그 때 그 때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도와주게 되었는데 이것이 영적 리더쉽을 발휘하는 배경이 되었던 같다. “당신은 자주 화를 내는데 사랑으로 느껴져서 좋다”라고 현지 사역자의 말이 생각난다.
지금도 새벽기도 때 가장 먼저 이들 사역자들의 이름들이 주님께 올려진다. 이들이 변화되어 죄사함의 증인된 것을 꿈꾸며 주님께 중보의 기도를 드린다. 기도를 드리면 이들의 생각과 마음이 열려 우리가 주고자 하는 복음을 깨닫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으로 기도의 향을 피운다. 주여! 이 땅에 속히 부흥을 주옵소서